본문 바로가기
Hana 컬쳐

화가의 가족을 담은 그림, 지붕 밑에서 발견한 행복의 순간들

by 하나은행 2015. 3. 12.
Hana 컬쳐

화가의 가족을 담은 그림, 지붕 밑에서 발견한 행복의 순간들

by 하나은행 2015. 3. 12.

Family Reunion’, Frederic Bazille, oil on canvas, 1867

‘좋은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으로 보듬어갈 때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화가들 역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애정 어린,혹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가족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림들은 가만히 속삭인다. 결국 행복은 먼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지붕 밑에 있다는 것을.

 


#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무릇 예술가란 유난히 불행에 민감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화가들도 여느 사람들과 엇비슷한 어린 시절을 거쳐왔을 텐데도 가족의 즐거운 모습을 회상한 그림이나 따스한 필치로 담아낸 가족의 초상화 등은 찾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그들이 어린 시절 겪었던 슬픔이나 불행의 기억들이 훗날 예술에 대한 창작력으로 승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일까, ‘화가의 가족을 담은 밝고 따스한 초상’은 의외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와 함께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의 초상에 담긴 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눈길로 그림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밝고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전원이고 가족들의 차려입은 모양새를 보면 이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임이 분명하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바지유의 가족이나 친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안락한 풍경 속의 가족들은 왜 하나같이 떨떠름하거나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지유의 가족사와도 연관이 있다. 몽펠리에의 부유한 양조장 집 장남이었던 바지유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지만, 이내 의과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그림에 매달렸다. 생활비를 송금하던 아버지는 장남의 일탈을 뒤늦게 알아채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그림 <가족의재상봉>을 보면, 그림 한가운데 무게를 잡고 앉아 있는 아버지는 유독 굳은 표정으로 화가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메시지는 명백하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바지유, 집안의 기대를 저버린 장남을 맞아들이는 식구들은 아들을 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도 없어서 당혹해 하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중인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족들의 엇갈린 시선이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인지 이 작품은 1867년 프랑스 살롱전에 입선했다. 아마도 바지유로서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택한 자신의 길이 옳았음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이 작품이 살롱전에 입선한지 3년 후인 1870년 바지유는 보불 전쟁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스물아홉, 채 피지도 못한 젊디젊은 화가의 죽음이었다.

 

The Family’, Egon Schiele, oil on canvas, 152×162.5cm, 1918

# 새 생명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바람

 

그런가 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생각하며 미래의 가족을 흐뭇하게 떠올린 작품도 있다. 1918년 그려진 에곤 실레(1890~1919)의 <가족>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실레 자신과 그의 아내 에디트, 그리고 에디트가 임신하고 있는 아이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평생 권위적인 아버지, 보수적 화단에 반발하고 ‘음란한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실레는 아내의 임신 소식에 비로소 안락한 가정에 대한 희망을 안게 되었던 모양이다. 

마침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기념해 열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실레의 그림이 큰 주목을 받은 터여서 화가의 앞날은 이제 탄탄대로인 듯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가족>에는 늘 실레의 화폭을 채우던 관능적인 이미지나 죽음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색채가 담겨 있지 않다. 젊은 부부는 천진한 표정으로 꼬물거리는 작은 아기를 중심으로모여 있다.

남녀 모두 누드로 그려졌지만 실레 특유의 죽음에 맞닿은 관능보다는 건강한 가족애가 더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실레가 꿈꾸었던 ‘단란한 가족’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소망이었다. 1918년 가을,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했던 스페인 독감이 빈에 상륙했다.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는 독감에 걸리자마자 손쓸 틈도 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인 10월 28일, 실레 역시 스물여덟의 나이로 에디트를 따라갔다. 

에디트가 죽은 후사흘 동안, 실레는 살아 있거나 이미 죽어버린 에디트의 초상을 무수히 그렸다. 그 스케치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들이 되었다.

 

‘The Artist’s Family’, Pierre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896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풍경

 

그러나 화가들이 모두 가족의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 동시에아내 알린과 백년해로하며 가정적인 행복도 만끽한 행운의 화가였다.

르누아르는 리모주의 가난한 집안 태생이었고, 열두 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며 푼돈을 벌어야 했던 처지였다. 그러나 이처럼 빈한한 환경에서도 타고난 예술적 자질은 빛을 발했다. 그는 파리의 샤를 글레르 화실에서 만난 모네, 시슬리 등과 함께 빛의 미묘한 색채와 형태를 형상화하는 ‘인상파’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인상파에 대해 물밀 듯 쏟아졌던 혹독한 비난도 르누아르의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자신의 길을 확신하고, 그 어떤 외부의 비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간 뚝심의 소유자였다.

르누아르의 그림 <화가의 가족>에 담긴 풍경은 르누아르라는 한 남자가 그러한 뚝심 끝에 얻어낸 경제적 성공과 안락한 가정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모델들과 몇 번의 염문을 뿌렸고, 그중의 한 사람인 알린 사리고와의 사이에 1885년에 아들 피에르를 얻었다. 1886년 르누아르가 그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델이 바로 알린과 피에르였다. 그리고 르누아르는 1890년 알린과 결혼해서 두 명의 아들을 더 얻었으며 세 아들들 중 두 명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술가가 되었다.

특히 둘째 아들 장은 1945년 아카데미상을 받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아버지의 재능이 아들에게서 다시 한 번 꽃핀 셈이다. 1896년 르누아르가 그린 <화가의 가족>은 아내 알린과 아들 피에르, 장, 그리고 알린의 사촌인 보모 가브리엘 르나르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맨 오른쪽 소녀는 이웃이었다. 제법 큰모습인 피에르와 아직 아기인 장, 그리고 아내알린의 여유 있는 모습을 담은 화폭에서 가족에대한 화가의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아마도 르누아르는 자신이 거둔 성공 못지않게 이 평범한 행복에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따스한 그림은 보는 이에게 소리 없이 말한다. 결국 행복은 먼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지붕 밑에 있으며, 단란하고 건강한 가족처럼 영속적인 행복은 다시없다는 것을. 평생 성실하게 그림을 그린 르누아르는 자신의 작품이 루브르에 소장되는 장면을 목격할 만큼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끝에 191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4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글·전원경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