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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그림으로 엿본 가족의 풍경들

by 하나은행 2015. 3. 4.
Hana 컬쳐

그림으로 엿본 가족의 풍경들

by 하나은행 2015. 3. 4.

# 초상화 속 역사의 굴레와 내밀한 이야기들, 그림으로 엿본 가족의 풍경들


꼿꼿한 자세, 긴장된 표정, 경직된 분위기. 가족사진을 찍던 날 카메라 앞에 서면 왜 그리도 몸이 뻣뻣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화가 앞에 선 왕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자세와 표정은 지금의 가족사진처럼 경직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림에 얽힌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서로의 미묘한 심리 전선이, 역사의 굴레가 한눈에 보입니다.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Francisco Goya, oil on canvas, 280×336cm, 1800

# 왕실 초상화에 얽힌 불편한 진실들


이 작품은 스페인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프란시스코 고야가 궁정의 수석화가 지위에 오른 이듬해에 그려졌다. 고야는 자신에게 스승이 셋이 있다고 했는데,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왼쪽에 커다란 이젤을 세워놓고 있는 화가는 분명 <시녀들>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고야 또한 자신이 왕실의 가족을 그리는 지위에 올랐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화가는 왕실 가족과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다. 마치 화려한 영광의 무대에서 비껴나 냉정한 시선으로 권력의 허상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10년 전, 마드리드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첫 인상은 아주 기이했다. 왕실 초상화를 수도 없이 봤지만 이 작품은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화면 속 인물들이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들처럼 멍청해 보이고 얼어 있다고나 할까. 

고야는 열세 명이나 되는 왕실 가족을 화면에 촘촘하게 그려 넣었다. 화면 왼쪽 그룹에서 가장 앞쪽에 푸른 제복을 입고 있는 인물이 카를로스 4세의 장남으로 훗날 부왕을 폐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되는 황태자다. 화면 가장 왼쪽의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은 황제 부부의 둘째 아들 카를로스 왕자이며, 페르난도 황태자 바로 뒤에는 국왕의 여동생인 마리아 호세파 공주가 나이 든 할머니 모습으로 서 있다. 

마리아 호세파는 당초의 스케치에 비해 훨씬 더 흉측하게 그려졌다. 한편 황태자의 오른쪽에 얼굴을 뒤로 돌린 가장 특이한 포즈를 취한 여성은 카를로스4세의 맏딸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는 도나 카를로타이다. (그녀는 장차 왕세자비가 될 나폴리 여왕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라는 설도 있다.) 화면 정중앙에는 보통의 왕실 가족 초상화처럼 왕을 중심으로 배치하지 않고, 어린 남매들을 양 옆에 두고 있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를 세웠는데, 왕실의 실질적인 주인 행세를 했던 그녀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이 두 명의 어린아이들은 당시 재상이자 왕비의 애인이었던 고도이의 아이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그림에서 남자아이는 실제로 고도이를 매우 빼닮게 그려졌다. 여자아이의 머리핀과 왕비의 머리핀은 화살촉 같은 모양인데 이는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촉 모양이다.이 장식은 여성이 사랑을 찾고 있다는 은유로써 왕비의 불륜이나 남성 편력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오른쪽엔 배가 불룩 나온 국왕 카를로스 4세가 마치 술을 마신 듯 붉은 얼굴을 하고 등장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다. 국왕의 바로 뒤에는 국왕의 남동생 안토니오의 얼굴이 간신히 보인다. 안토니오는 국왕 뒤에서 항상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그런지 실제 국왕 바로 뒤에 배치되었다. 

안토니오 곁의 여성은 안토니오의 부인으로 작품 당시 사망해서 옆모습으로 간신히 표현되었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 부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국왕의 외손자를 안고 서 있다. 고야는 무려 네 명의 국왕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1800년 여름 휴가차 별궁으로 휴가를 떠난 왕실 가족을 위해 그린 것이다.

다 같이 모일 시간이 부족한 탓에 등장인물들을 따로그리고, 마드리드 자신의 화실에서 완성했다. 인물들은 모두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들이 처한 불안한 현실을 내비치는 듯하다. 실제로 당시 스페인 왕실은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는 이웃 나라스페인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카를로스 4세와 7촌 관계였던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이로부터 7년 뒤 카를로스 4세 역시 아들 페르난도 7세를 내세운 반대파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어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고야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자연스럽게 구성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세 그룹으로 나눠서 배치했다. 

중앙의 왕비와 아이들은 뒤로 물러나 보이게 하고, 양쪽의 인물들은 앞으로 전진 배치시켜 화면에 공간감과 거리감을 주었다. 동시에 국왕과 왕자들은 제복에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의상으로 포장해주는 대신 그들의 권위와 위엄은 슬쩍 빼놓아 화려한 왕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퇴폐와 허영, 무능력과 독재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포착했다. 왕실 가족은 이런 고야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이후 다시는 그림을 주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 왕비와 아이들, 그림에 비친 불행의 전조

 

‘Marie Antoinette and her Children’, Louise Elisabeth Vigee Le Brun, oil on canvas, 275×215cm, 1787

18세기 중엽 무렵, 가문의 세력이 기우는 것을 염려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철부지였던 열네 살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렇게 루이 오퀴스트(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은 그녀가 31세가 되던 해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였던 비제 르브룅에게 의뢰해 그린 작품이다. 

결혼 후7년이나 후사가 없었지만 루이 16세의 수술 뒤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세 명의 아이들과 포즈를 취했다. 혁명이 발발하기 불과 2년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마리와 아이들의 표정에는 어딘지 불안하고 공허한 느낌이 물씬하다. 더군다나 당시는 둘째 딸이 막 사망한 터였다. 화면 왼쪽에는 첫째 딸, 마리 테레즈가 어머니의 오른팔을 잡은 채 어딘가 응시하고 있다.

훗날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그녀는 13세부터 17세까지 4년 동안이나 파리의 텅플 성에 유폐되었다가 오스트리아에 잡혀 있던 혁명군 포로들과 맞교환 되는 조건으로 어머니의 고향,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는데 이미 실어증 상태였을 만큼 불행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고모의 죽음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마리 테레즈는 이후 건강이 회복된 후 삼촌의 아들과 결혼해 1814년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인 것이다. 

한편 앙투아네트가 안고 있는 아이는 1785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 루이 17세로 불리는 루이샤를이다. 그는 형 조제프가 죽은 후 자동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혁명 이후 부모와 떨어져 빛도 들지 않는 독방에 유폐된 채 학대를 받다가 1795년,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 아이 역시 지독히도 불행했다. 

여덟 살에 술을 마신 후 재판정에 나가 어머니를 고발해야 했던 것이다. 빗자루 놀이를 하다가 고환을 다쳐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앙투아네트가 매일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와 격리되어 열쇠공 부부의 보호를 받다 가려운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광경이 발각되자 무서워서 어머니가 가르쳐주었다고 둘러댄 게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앙투아네트에게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우려 혈안이 된 혁명 재판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식에게 성적 유희를 가르쳤다는 어이없는 묘안을 만들었다. 이날의 재판 기록에는 아이의 삐뚤삐뚤한 서명이 아직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아이는 뒤쪽의 빈 유아용 침대를 가리킨다. 1781년 태어난 루이 16세의 장남 노르망디 공작 루이 조제프다. 그는 태어난 지 11개월 만에 죽은 그의 동생 소피베아트리스 공주의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척추가 휘어지는 기형적인 결핵성 척추염으로 대혁명 두 달 전에 사망했는데 그림의 포즈를 설 당시에도 중병에 걸려 있었다. 원인 모를 고열과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고 죽어 갔지만 어쩌면 동생들에 비해 덜 불행했는지도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그림이 그려진 뒤 6년 후, 콩코드 광장 단두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이처럼 화목한 가족사진 같은 작품에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슬픈 이야기가 스며 있다.

 


# 사냥을 떠난 가족들

 

‘Melbourne and Milbanke Families’, George Stubbs,oil on canvas,147.3×97.2cm

마지막에 소개할 작품을 그린 화가, 스티브스는 리버풀에서 가죽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가게에서 처음으로 영국의 사냥, 경마, 말의 사육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마구간의 남자들, 상류층 여인들, 기수들을 만났다. 그는 계급 구별을 회화로 표현하는 데 매우 능숙했으나 상류층 사람들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렸다.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모두 하나의 초상화’라고 평가 받았을 만큼 각각의 인물을 단일 초상화 못지않게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했다.인체를 표현하기 위해 화가는 의대에서 해부학을 공부했고, 말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말을 해부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말의 해부학>이라는 동판화를 출판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가장 최고의 화가로 추앙 받는 역사 화가가 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서른 살 즈음 떠난 로마 여행 중 말을 공격하는 사자상의 압도적인 조형성에 매료되어 역사 화가의 꿈을 버리고 30여 년을 이 주제에 매달렸다. 

화면 왼쪽에 마차를 타고 있는 어린 여성은 17세의 엘리자베스 밀뱅크이며 그녀의 곁에는 아버지 랠프 밀뱅크가 마차에 두 손을 모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화면 중심에는 그녀의 오빠 존 밀뱅크가 자신의 애마를 붙들고 두 다리를 꼰 채 여유 있는 표정으로 화면정면을 바라본다. 화면 전면에 페니스톤 경의 스패니얼 사냥개가 이들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 가장 오른쪽으로 훗날 엘리자베스의 남편이 되는 페니스톤 램 경이 역시 화면의 인물 중 유일하게 애마에 올라탄 채 미래에 그의 부인이 되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본다. 이 인물은 훗날 멜버른 백작이 된다. 밀뱅크 가문은매우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졸부였던 페니스톤 경을 맞아들인다. 이는 1784년 그의 아내가 영국 황태자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백작이 된 그의 위치 때문이다.


글·윤운중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

 

글을 쓴 윤운중은 ‘루브르를 천 번 가본 남자’, ‘유럽 도슨트계의 전설’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미술 해설가다. 루브르 미술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천 번 이상 도슨트했고 그를 거쳐간 관객 수가 4만 명에 이른다. 명화 속 숨은 이야기에 탁월한 입담을 자랑하며 미술과 음악을 접목한 ‘아르츠 콘서트’의 콘서트 마스터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는 《윤운중의 유럽미술관 순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