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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나와 당신의 인공낙원', 표정이 지워진 군중에 공공의 기억을 담는 이상원 작가

by 하나은행 2014. 7. 16.
Hana 피플

'나와 당신의 인공낙원', 표정이 지워진 군중에 공공의 기억을 담는 이상원 작가

by 하나은행 2014. 7. 16.

‘사회’라는 공통주제로 묶인 어느 전시회에 이상원 작가의 군중 시리즈가 걸려 있었다. 그가 바라본 해변 풍경은 푸른 바다가 아닌 갈색 모래 위에 자리 잡은 빽빽한 군중의 모습이다.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군상이 그려진 작품을 보며 누군가는 즐겁기보다 지옥 같은 휴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원 작가는 결코 획일화된 여가의 불편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동시대 사람들이 기억하는 여가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회로칩에 가깝다.

 

‘Pyramid’, watercolor on paper, 56×42cm, 2013
‘Pyramid’, watercolor on paper, 56×42cm, 2013

얼마 전 <영은미술관 입주 작가전>을 마쳤어요. 오랫동안 다룬 ‘여가’ 라는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전시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작가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거치면 의무적으로 전시를 해야 해요. 

 

약속된 시간 안에 온전히 새로운 작업만으로 전시를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 역시 6개월 동안 입주 작가로 있으면서 새로운 작업을 하기보다 그간의 작업을 어떤 형태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 했어요. 영은미술관 입주 작가가 되기 전 프랑스 파리시테데자르(Cite Internationale des Arts)에서 1년 동안 작업한 것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작업을 덧붙이는 시간이었어요. 작업실과 미술관이 가까워서 수 시로 전시 공간을 보면서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구상하고 아이디 어를 내는 작업이 주를 이뤘죠. 기존이 수채화 작업 위주였다면 유화 나 아크릴처럼 재료를 다양하게 쓰고 작품의 크기와 규모를 달리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Q. 어릴 적 칠갑산 아래에서 살았죠. 산골에서 자란 경험이 작업에 영향 을 끼쳤나요?

 

말씀하신 대로 고향이 충남 청양 산골이에요. 칠갑산을 넘어 5km씩 걸 어 학교에 다녔어요. 중학교 때 서울 역삼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주변 환경이 변함에 따라 감정적으로 생기는 반응이 있었어요. 인구밀도나 활동량이 적은 동네에서 가족과만 지내던 기억이 전부였으니까요. 들판에서 벌레 잡고 개천에서 수영하면서 지내다가 서울에 왔을 때는 충 격이 컸어요. 지금은 작업하러 뉴질랜드,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여러 나라를 다녀도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않는데, 당시에는 면역이 없었던거죠.

 

서울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인파와 야경이 깊게 각인됐어 요. 너무 거대해서 두렵기도 했어요. 도시생활에 주눅들어 있을 때, 내가 고향에서도 이 도시에서도 가장 잘할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해봤어요. 그게 그림이었어요.

 

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안 공모전 세대가 끝나고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시대가 왔어요. 하이퍼리얼리즘, 추상미술, 팝아트 같은 그림의 형식과 관 계없이 프로젝트성 작품이 환영받는 분위기였어요. 화법보다 사회적인 현상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며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던 제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죠. 창동 스튜디오 레지던시와 인연을 맺었고, 금호 영 아티스트 상을 수상하면서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Patterns of Life’, watercolor on paper, 편집이미지, 2009
‘Patterns of Life’, watercolor on paper, 편집이미지, 2009

 

 

Q. ‘여가’라는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생일 때는 상경했을 당시의 시각적 경험을 담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공식적인 여가가 생겼고 처음으로 여 가를 제대로 경험하게 됐어요. 주 5일 근무제가 막 시작되고 KTX가 등장하면서 전국이 일일 생활권 안으로 들어올 때였어요. 장기 휴가가 생기면서 취미도 다양해지고 라이프스타일도 바뀌었죠. 저 역시 여가를 누리면서 그 장소에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심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강 근처에 살 때인데, 다리에서 문득 내려다본 풍경이 마치 상경했을 때 서울을 본 것처럼 강한 인상으로 남았어요. 마침 졸업 논문을 쓸 때라 주제를 잡았고, 작업 주제로 확장했어요.

 

 

Q. 초기 작품들에서 휴가지의 배경이 두드러졌다면 최근 작품에는 점점 생략되는 경향이 보여요.

 

처음에는 스키장의 눈에 난 발자국까지 그렸어요. 여가 장소에서 여가 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이고 획일화된 모습으로 주제를 옮겨가다 보니 점점 단순화되고 패턴화되었어요. 예를 들어 해수욕장을 그릴 때 바닷물이 아닌 모래사장만 그려도 거기가 어딘지 누구나 알 수 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즐거운 바닷가 추억을, 어떤 사람은 지옥같은 인파를 떠올릴 수 있죠. 동시대를 살아가는 집단과 군중의 공통 분모를 찾아가기 때문에 점점 배경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Swimming Pool’, oil on canvas ,194×130cm, 2007
Swimming Pool’, oil on canvas ,194×130cm, 2007

 

 

Q.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을 멀리서만 잡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 표정은 보이지 않아요.

 

제 작품에서 사람은 그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예요. 사람이 모여 집 단과 군중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움직임이라든지 무슨 옷을 입는지에 포인트를 두지요. 그것을 통해 표정을 읽을 수 있게만들려고 해요. 관람객이 얼굴없는 사람 모습에 자기 기억을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대부분 그림에서 얼굴이나 표정이 중요하지만 저는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각자의 이야기를 대입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하는 거죠.

 

 

Q. 원근이 없고 평평한 화면은 동양화 기법을 떠올리게 해요.

 

동양화를 많이 보고, 배우면서 영향을 받았어요. 동양화의 여백 개념 이라든가 건물과 자연 배경, 인물을 동일선상에 놓는 동양화적 기법들이 여전히 흥미로워요. 그리고 제 작업이 실제 인물의 사진을 찍어한 사람 한 사람 그림으로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서양화적 시각에서는 균형과 통일성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2. ‘코끼리가족’, watercolor on paper, 28×40cm, 2013 3. ‘퐁피두 광장에서’, watercolor on paper, 41×30cm, 2013
2. ‘코끼리가족’, watercolor on paper, 28×40cm, 2013 3. ‘퐁피두 광장에서’, watercolor on paper, 41×30cm, 2013

 

 

Q.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어떤 선정 과정을 거쳤나요?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공간을 발견하거나 주변의 추천을 받아 장소를 찾아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개인적인 경험으로 장소를 선택해요. 어느 날 아버지가 운동으로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등산 가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셨는데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 모습이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졌어요. 그때까지 한번도 관심 가진적 없는 산에 오르내리면서 관찰하고 이미지를 수집한 후에 그린 작품이 <백운대> 예요. 장소를 정한 후에는 여러 군상을 사진으로 담은 후 그릴 소재를 선별한 다음 캔버스 위에 어울리도록 배치해요.

 

 

Q. 센트럴파크, 센강, 리도해변 등 장소가 해외로 확장되기도 했어요.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도시에서 작업했어요. 관광할 때는 몰랐는데 오랜 기간 머물다 보니 서울에서 본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 노는 걸 즐긴다면 프 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정도의 차이였어요. 하지만 공통된 모습은 혼자가 아닌 연인이나 가족과 놀러와 행복과 휴식을 즐기려는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인종과 문화와 관계없이 세계 도시를 관통하는 모습을 작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서울의 한강시민공원, 해글리 파크, 뉴욕의 센트럴 파크, 프랑스의 센 강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런(Run)>이나, 한국과 중국의 다양한 스키장의 야경을 연결해 만든 <화이트 나이트 (White Night)>, 해운대와 이탈리아의 리도 해변, 프랑스의 도빌과 생말로 해변의 풍경을 담은<인 서머(In Summer)>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제작한 작품들이에요.

 

'수족관’, watercolor on paper, 33×50cm, 2013
'수족관’, watercolor on paper, 33×50cm, 2013

 

 

Q. ‘여가’라는 일상의 활동을 주목하지만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현대인의 일상을 사회적으로 조망하려는 모습이 보여요.

 

최초의 시선은 원초적인 감정에 가까웠어요. 몇 만 명씩 운집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으니까요. 점점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모두 비슷한 옷차림으로 똑같은 행위를 하는 현상이 특수하고 사회적이라고 느끼게 되었어요. 휴식이나 여가는 사적이고 개인 적인 취향이며 주관적인 선택에 의한 나만의 시간인데, 결국 한 장소에 모이잖아요.

 

예를 들어 인라인 스케이트가 유행하면 거리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으로 넘쳐나고, 조깅이 유행하면 공원에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요. 저는 여가가 유행하는 현상에 주목했어요. 그렇지만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맥락은 어린이날에 부모님과 손잡고 유원지에 간다든지 여름방학이면 물놀이를 가는 것처럼 유년 시절부터 체득한 공공의 기억, 추억이에요. 그걸 동시대에 맞게 객관화해 작품 에 투영하려고 합니다.

 

군중을 그린 그림을 보면 시선 이동이 느껴져요. 앞이나 옆에서 보는 시선을 내려다보는 부감으로 그리는 등 각도와 구도가 변화무쌍해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주제는 확고하지만 표현하려는 장면에 따라 방식은 달라져요. 군중의 동일하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그릴 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버드아이뷰를, 좀 더 개인적인 움직임을 그릴 때는 넓게 펼쳐진 파노라마 뷰로 그림을 구성하죠. 똑같은 모습으로 조깅하는 여러 군상을 표현한 작품에서는 여러 장의 그림을 합쳐 아이콘처럼 보이게 했어요.

 

꾸준히 하나의 화법으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작가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그 점을 열어놓고 생각해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어떻게 고민하고 실험하며 시각화하는지 그 과정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어요.

 

 

Q. 회화 작품뿐 아니라 설치나 퍼포먼스, 공공 프로젝트까지 작품 활동을 넓은 영역에 두는 이유와 같다고 보면 될까요?

 

사람들은 작가의 작품을 전시나 인터넷, 잡지 등을 통해 이미지로만 만나잖아요. 저는 작가이기 이전에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부부와 미래의 아기를 그린 그림, 내 아이와 놀면서 끄적거린 그림처럼 일상에서도 언제나 그림을 그리죠.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를 끌고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집에 장식해뒀는데 친구들이 그걸 보고 왜 자기 그림이 아닌 엉뚱한 그림을 걸어놨냐고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작가인 나와 일상의 내가 그린 그림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작업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깅하는 사람들을 그린 <런>이라는 작품을 티셔츠에 전사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입혀 함께 춤추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어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제대로 구현하기 위 해 스스로 틀을 만들어 갇히지 않으려고 해요.

 

‘전국노래자랑’, watercolor on paper, 36×48cm, 2013
‘전국노래자랑’, watercolor on paper, 36×48cm, 2013

 

Q. 여가를 다루는 작가님의 실제 여가 생활은 어떤가요?

 

오랫동안 여가라는 주제를 다루다 보니 작업과 개인적인 여가를 분리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계가 모호한 만큼 작업과 연관되는 보너스 같은 일들이 많이 따라오기도 해요. 해외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할 때 현지 스튜디오 관장님의 배려로 지인의 별장에 초대받은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쉬는 시간을 갖는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개인적인 여가 공간을 보며 작품에 반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리조트 기업이 주관하는 문화 마케팅의 일환으로 콘도 안에 작업실과 숙소를 마련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지방 열 군데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담을 수 있어 기대하고 있어요. 가정이 생기고 난 후에는 아이와 함께 휴가지에 다니면서 사진 촬영하는 게 더 쉬워졌어요. 예전에는 해수욕장에서 촬영하면서 오해도 많이 샀거든요.(웃음)

 

 

Q. 지난 10여 년 동안 이어온 ‘여가’라는 주제에서 앞으로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 생각인가요?

 

유럽에 갔을 때도 일부러 프랑스와 이탈리아만 둘러보고 말았어요. 아프리카나 남극, 북극까지 아직 봐야 할 것이 많아요. 지금까지 작업한 10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장기적으로 더 많은 풍 경을 다양한 방법으로 담아 작업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보는 이들에게 풍부한 경험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어요.

 

글·박해원 | 진행·이소진 | 디자인·심혜진 | 인물 사진·김규한 | 도움·LIG Art 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