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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영상으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의 풍경들 '에드워드 호퍼와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by 하나은행 2014. 5. 21.
Hana 피플

영상으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의 풍경들 '에드워드 호퍼와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by 하나은행 2014. 5. 21.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대기권 바깥부터 요정들이 지배하는 땅까지,영화기술의 발전은 매순간 현실과 가상의 간극을 좁혀갑니다. 19세기 말 처음 탄생한 기록 영상과 21세기의 영화는 이제 거의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나 10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규칙들도 있습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사각 무대 위에서 상연됩니다. 감독들은 한 장면 한 장면의 미학적 완성도와 긴장감을 위해 미장센의 구성 요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많은 장면들이 회화에서 그 영감을 얻습니다. 프레임 안에 세계를 호출한다는 점에서 회화는 영화의 양식적 선배이기도 합니다. 

 

무수한 현대 화가 중에서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감독들의 훌륭한 조언자였습니다. 문과 창문, 실내와 실외가 중첩되며 기이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구도, 20세기 미국의 황량한 정서, 고독한 인물들과 아름다운 색감의 조화는 앨프리드 히치콕, 빔 밴더스, 짐 자무시 등 많은 감독들을 매혹시켰습니다.

 

 

 

살아 숨쉬는 탁월한 오마주

 

에드워드 호퍼가 던지는 영감은 형식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소실점은 캔버스의 깊숙한 안쪽에 위치하지만, 인물들의 시선은 언제나 화폭 바깥의 어딘가를 향합니다. 호퍼는 인물이 취하는 포즈와 적요한 공간만을 노출시킬 뿐, 그들이 무엇을 응시하고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스트리아 감독 구스타브 도이치의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액자의 의뭉스러운 바깥에서 출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연속 단막극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각각의 단막극은 호퍼의 대표작 13점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재현합니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현실을 재구성합니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취하는 방식은 초창기 영화 스타일 가운데 하나였던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을 연상케 합니다. ‘살아있는 그림’을 뜻하는 타블로 비방은 명화나 역사적 장면을 정지화면처럼 연출한 상영물이었죠. 도이치 감독 역시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호퍼의 그림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카메라는 호퍼의 캔버스가 묘사하는 공간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림 한 점에 표현된 세계’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에,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서는 배우의 동선과 제스처가 이야기와 정서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감독은 셜리의 움직임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서부터 그녀의 관심사와 삶을 구상해갔다고 말합니다.

 

스토리보다 이미지가, 캐릭터보다 제스처가 먼저 완성된 셈입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해 완성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21세기의 기술로 다다른 타블로 비방의 최신 판본이자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탁월한 오마주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대체로 두세 명의 인물만이 등장합니다. 서로 소통하는 일마저 어려웠던 시대의 초상이랄까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들 또한 주인공 셜리와 그녀의 남자친구 스테판이 전부입니다. 호퍼가 그린 여자들의 느슨한 교집합이자 영화의 화자인 셜리는 ‘그룹 시어터’에 소속된 배우입니다. 그녀가 체험하는 시간대는 호퍼가 13개의 작품을 제작한 연대기와 일치합니다. <호텔룸>이 그려진 1931년부터 <체어 카>의 물감이 마른 1965년까지, 셜리의 일상은 각 그림의 제작 연도에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들을 관통하며 이어집니다.

 

호퍼 특유의 환하고 공허한 실내 공간에 실제의 역사가 타전되는 통로는 셜리가 듣는 라디오와 뉴스입니다. 주식시장 붕괴와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과 매카시 광풍,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마틴 루서 킹의 인종차별항쟁까지 20세기 중반의 미국사는 앵커의 목소리를 통해 그림 같은 화면 위를 떠돕니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촘촘한 개연성보다 역사와 개인,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시적 비유들로 충만한 영화입니다.

 

도이치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호퍼의 작품은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무대에 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작품의 방법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셜리가 배우로 활동하고 스테판이 사진기자로 일한다는 설정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두 직업 모두 이미지를 포착하고 재현하는 일이니까요.

 

감독 입장에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제약으로 가득한 작업이었습니다. 미술감독 한나 쉬멕은 호퍼의 색감이 왜 그토록 매혹적인지 끊임없이 질문 했다고 합니다. 원본이 전시된 갤러리를 몇 번이나 방문했고, 컬러 차트를 동원해 영화의 색을 결정한 후 알맞은 조명을 설계하는데 만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호퍼 작품의 핵심인 차가움과 따뜻함, 빛과 그림자의 조화는 그토록 치밀한 계산을 통해 영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림의 구도와 화면을 일치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그림에서 침대는 3m에 달했고, 앉기 힘들 정도로 좁은 안락의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밤의 사무실’에서 그림의 구도는 CCTV 카메라의 앵글과 유사합니다. 동일한 효과를 위해 한나 쉬멕은 세트의 모든 가구를 기울여 배치해야 했습니다. 각 그림과 최대한 동일한 시선, 동일한 각도를 유지하기 위해 손의 자연스러운 떨림을 담는 ‘핸드헬드 카메라’나 카메라 두 대가 서로 마주보며 촬영하는 ‘리버스 쇼트’는 전혀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줌 인과 줌 아웃을 조심스럽게 이어가며 거의 언제나 미술관 관람객의 위치에 머물러 있습니다. 관음증적이고 관찰자적 위치에 섰던 에드워드 호퍼의 태도도 그와 같았죠. 결국 쉬멕과 도이치는 모든 에피소드에서 적어도 한순 간 영화와 그림을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궁금했던 이야기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수미쌍관 구조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호퍼의 후기작 <체어 카>에서 인용한 장면입니다. 나란히 늘어선 창문의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고 빛만이 하얗게 쏟아집니다.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침묵 대신 기차와 경적소리, 빗소리 등의 소음들이 차량 안으로 아득하게 흘러든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이런식으로 회화의 평면적 세계에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부여해갑니다.

 

1932년작 <룸 인 뉴욕>의 방에서는 셜리의 연인 스테판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사진기자 스테판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지만, 사실 그는 대공황으로 직업을 잃고 빵을 배급받기 위해 매일 줄을 섭니다. 1943년작 <호텔 로비>의 공간에서 셜리는 엘리아 카잔의 영화 <위기일발>에서 하녀 역할을 맡아 대사를 연습합니다. 엘리아 카잔은 배우들에게 메소드 연기를 끌어내고 많은 명작을 남긴 거장 이었지만,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동료 영화인들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한 배신자이기도 했습니다. 

 

냉전의 현실은 1952년작 <모닝 선>의 화폭을 옮긴 장면에서 셜리에게도 실망감을 안깁니다. 개인의 삶과 역사의 접점을 매혹적으로 잇는 한편, 카메라는 몇몇 그림에서 사랑의 단절과 현대적 고독을 예리하게 해석합니다.

 

 

 

1963년작 <인터미션>의 극장 안에서 셜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도 추억도 모두 잊고 배회하는 영화를 조용하게 관람합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셜리가 읽는 책의 저자 에밀리 디킨슨은 천재 시인이었지만,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고독한 은둔자로도 유명했습니다. 멜랑콜리한 상실감이 아니라 단단한 소외와 고독이 넘실대는 호퍼의 세계에 디킨슨만큼 어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1959년작 <엑스커전 인투 필로소피>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던 셜리는 스테판이 들어오자 뒤돌아 누워버립니다. 서늘한 뒷모습 위로 셜리가 소리내어 읽던 구절이 귀를 맴돕니다. “동굴 속 사람들은 그림자를 통해 이미지를 보지만 그것은 그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쇠사슬을 끊고 동굴을 나가 태양 아래 진짜 세계인 이데아를 봐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이데아를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조차 갖기 힘든 시대입니다. 현실과 가상, 참과 거짓의 경계 는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지고 있죠. 사물의 본질은 물론 고독하게 방황하는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에드워드 호퍼의 이미지들을 통해 현실의 조각들을 아름다운 가상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글·정미환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기한 | 도움·영화사진진

 

정미환은 철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한 후 잡지 몇 곳을 거치며 음식,술,건축,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써왔다. 매달 표정을 바꾸는 트렌드가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음악과 영화는 스스로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친구들이었다. 현재는 개인 취향과 공공 취향 사이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쓰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