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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 "넌 나의 뮤즈, 난 너를 창조했네"

by 하나은행 2014. 5. 1.
Hana 피플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 "넌 나의 뮤즈, 난 너를 창조했네"

by 하나은행 2014. 5. 1.

시코의 국민화가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프리다 칼로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단언컨대 미술사에서 삶과 예술이 그처럼 완벽하게 일치한 화가가 없을 정도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한 존재는 바로 칼로의 연인이자 동지이고 뮤즈인 디에고 리베라였다.

 

그렇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칼로에게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창조하는 그녀만의 파워 혹은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Self Portrait with Cropped Hair’, Frida Kahlo, oil on canvas, 40×28cm, 1940
'Self Portrait with Cropped Hair’, Frida Kahlo, oil on canvas, 40×28cm, 1940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육체적인 불운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을 보낸다. 헝가리계 독일 출신의 유태인인 아버지와 스페인 토착민 혼혈인인 어머니 사이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난 칼로. 몽상가였던 아버지는 나약하고 비현실적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엄격하고 독선적이었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은 칼로는 아버지로부터는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따스한 정을 받지못했다.그런 칼로에게 삶의 고통은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왔다. 여섯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된 것도 모자라, 18세에 끔찍한 버스 사고까지 당하고 만 것이다. 그렇잖아도 소아마비로 열등의식이 있었던 그녀에게 닥친 끔찍한 사고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평생 수십여 차례의 수술을 계속 받아야 했을 정도로 사고 후유증은 컸다.

 

사고 당시 함께 있었던 첫사랑 남자 알레한드로와 헤어진 칼로는 어린 시절부터 사모하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그녀의 부모는 반대가 심했다. 리베라는 공산주의자인데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나이도 많고 이미 네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물두 살의 칼로는 마흔세 살의 리베라의 세 번째 부인이 된 셈이다.

 

결혼 초 칼로는 자신을 예술가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재치 있고 천재적인 유머 감각이 있었다. 순종적이면서도 능란하고 섬세한 지배력으로 남편과 집안을 관리하는 여자로서 만족하는 듯 보였다. 이 부부는 집을 지을 때 건물을 두 채로 분리하고, 각 건물을 다리로 연결해 드나들게끔 만들었다. 이 다리는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 인 부부의 독특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곳에서 칼로는 리베라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리베라의 기꺼운 동의 아래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결혼 전의 성을 그대로 쓰며 살았다.

 

 

'Frieda and Diego Rivera’, Frida Kahlo, oil on canvas, 100×79cm, 1931
'Frieda and Diego Rivera’, Frida Kahlo, oil on canvas, 100×79cm, 1931

그녀에게 리베라는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신성한 괴물 같은 존재였다. 스페인계 인디언과 포르투갈계 유태인의 혈통을 지닌 리베라 는 멕시코, 마르크스주의, 인민, 많은 여자, 초목 그리고 지구의 평화 같은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혁명가적 자질을 갖춘 ‘상남자’ 였던 것이다.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늘 주변에 여성들이 넘쳐났던 리베라, 그에겐 성의 자유가 예술의 자양분이었고, 혁명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강력한 여성 편력의 디에고 때문에 칼로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폭풍우 같은 삶 속에서도 두 사람의 공감대는 굳건했다. 두 사람 모두 강한 추진력과 격렬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유머, 지성, 사회의식, 인디오적 성향, 삶에 대한 자유분방한 태도 등 공통점이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을 가장 강렬하게 묶어준 것은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었다.

 

리베라는 칼로의 예술적 성공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으며, 언제나 기쁨이 넘치는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칼로를 최고의 예술가라고 극찬하곤 했다. 그럼에도 결국 칼로는 리베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칼로가 유산으로 상심해 있을 때,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칼로에게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좋 아하는 동시에 가장 증오했고, 모든 것을 나눈 자매였다. 크리스티나는 칼로와는 다르게 모성애가 강하고 쾌활하며 관대해서 기분 전환하기에 아주 편안한 상대였다. 그녀 역시 아무런 악의 없이 유혹해오는 리베라를 거부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exico), Myself, Diego and Se ̃nor Xo′ lotl’, Frida Kahlo, oil on canvas, 70×60.5cm, 1949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exico), Myself, Diego and Se ̃nor Xo′ lotl’, Frida Kahlo, oil on canvas, 70×60.5cm, 1949

결국 칼로와 리베라는 이혼하지만, 1년 만에 재결합한다. 재결합의 조건은 재정적인 면에서 독립할 것,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서 살 것,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을 것 등이다. 두 사람의 타협안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칼로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양성애자로 돌아선다. 그렇지만 재결합한 후 자유와 독립성을 얻게 된 부부의 유대감은 이전보다 강하고 넓어졌다.

 

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남자의 아내나 애인이 되는 것 보다는, 그의 최고의 동료가 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임을 깨달았다. 특히 칼로의 모성애는 점차 강해졌다. 늘 리베라의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유산과 사산 등의 아픔을 겪었던 칼로는 리베라를 더 이상 남자가 아닌 아들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만년의 작품 <우주의 포옹, 지구, 나, 디에고>는 그러한 칼로의 마음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프리다 칼로식 ‘피에타’인 셈이다. 칼로가 세계를 통찰하는 신(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 리베라를 마치 마리아가 서른셋의 예수를 안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작품 속에서 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디에고! 너는 예수와 같이 신적인 존 재다. 그렇지만 예수가 여자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듯이, 너도 결국 여자에게서 태어난 존재일 뿐이야! 나 프리다 칼로가 바로 너를 창조했단다. 너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을 거야!” 이런 사랑법, 칼로는 자기 사랑의 막강한 창조자였던 것이다.

 

글·유경희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 | 사진·이명수

 

글을 쓴 유경희는 미술평론가이자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장이다. 풍부한 문화적 배경과 예리한 시선으로 예술의 다양한 장면들을 끄집어낸다. 다양한 강연과 글쓰기를 더불어 하며 저서로는 《예술가의 탄생》 《10개의 테마로 만나는 아트살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