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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선택장애는 그만! 나만을 위한 진정한 선택의 방법

by 하나은행 2015. 10. 7.
Hana 컬쳐

선택장애는 그만! 나만을 위한 진정한 선택의 방법

by 하나은행 2015. 10. 7.

현대인들은 강요된 선택의 늪에 빠졌다. 때때로 선택을 할 때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 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진정한 선택은 무엇일까? 먼저 편리와 출세의 환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떤 선택에 앞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자.

얼마 전 강의에서 가슴 아픈 질문을 받았다. 열심히 ‘우리 삶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는데,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학생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말씀이 참 좋지만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취직도 해야 하고,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자립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으신 것 같은데, 저는 꼭 그런 꿈을 찾아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꿈을 꼭 찾아야 되나요? 그냥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바쁜데요?”

그 질문은 여러 가지 서글픈 울림과 항변을 담고 있었다. 그 질문을 통해 아주 복잡하게 얽힌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엿보는 듯 했다.

꿈을 찾아 사는 이들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걸까?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은 꿈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쓸데없는 일’과 ‘쓸모 있는 일’을 나누고, ‘꿈을 찾는 삶’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나누며, ‘나만 잘사는 것’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 학생이 전제하고 있는 가치관의 밑바닥에는 ‘실현될지도 알 수 없는 막연한 꿈에 인생을 걸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 두려움이 나에게도전해져 왔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오직 그 두려움을 느끼는 장본인 스스로 이겨나가야 할 고통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위인전을 많이 읽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새 아이들은 위인전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위인전 대신 어린이들이 열광하며 읽는 책들은 오바마, 반기문, 김연아 등 ‘지금 이 시대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셀러브리티’로 불리는 유명인의 성공과 출세를 담은 이야기들이라고.

내가 읽고 또 읽었던 위인전은 베토벤의 이야기였다. 빛바랜 갱지에 인쇄된 베토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누구도 자신의 꿈을 지원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청력을 상실해버린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는 한 사람의 투쟁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매질을 참아내며, 짝사랑의 연속으로 점철된 참담한 인연의 슬픔을 견뎌내며,나중에는 청력 손실로 인한 사람들의 비웃음까지 감내하며, 그렇게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음악의 우주를 힘겹게 한 곡 한 곡 빚어낸다. 그렇게 내게 위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는 베토벤이었다.

누군가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수많은 위인 중에서 ‘내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초등학생에게도 ‘타인을 감동시키는 인간의 탁월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나를 내버려두었던 시간, 무엇을 하든 ‘그저 알아서 잘하겠지’하고 혼자 두었던 시간의 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에게도 고독이 필요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훌륭한지, 무엇이 탁월한지’에 대해 어른들은 정답을 제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연아처럼 성공해라’, ‘반기문처럼 열심히 공부해라’, ‘오바마처럼 연설을 잘 해야지’하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이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탁월함인지, 무엇이 세속적인 성공에 찌든 사람들의 색안경조차 벗게 만드는 인간의 순수한 아름다움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롤모델이다’, ‘이 사람의 성공비결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젊은이들의 젊음을 꺾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스스로 삶의 통제자가 돼야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관계의 각종 억압 속에서 매일 짓누르는 우리 자신의 ‘자기다움’을 찾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부모라는 이유로, 학교선생님이라는 이유로, 회사 상사라는 이유로, 국민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따라야만 한다’고 교육받는 모든 가치를 의심한다. 그의 말투는 다소 과격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일관된 논리는 바로 누구도 우리 삶의 통제자로 군림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작 <나는 길들지 않는다>(김남주 옮김, 바다출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발상은 국가가 있기에 국민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직결되는 최대 악이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맹독이다.”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부모의 희생물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 2의 탄생을 뜻한다.”

부모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고 있는 모든 가치의 뿌리를 남김없이 의심하라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주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게 아픈 자문자답의 과정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남 탓만 할지도 모르기 때문.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엄마 탓이야, 아버지 탓이야, 친구들 탓이야, 선생님 탓이야, 이 어처구니 없는 나라에 태어난 탓이야… 이렇게 말이다.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위대한 행위이며, 젊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나는 길들지 않는다> 중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나답게 생각하는 그토록 간단한 길’을 가로막는지 살펴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가? 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대부분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아마도 ‘휴대폰 확인하기’ 아닐까? 현대인들은 시계로 쓰고, 알람으로도 쓰고, 스케줄표나 다이어리로도 쓰는 휴대폰을 통해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지금 휴대폰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자체를 ‘로그온’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휴대폰을 열고 시간과 메일과 뉴스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에 직면한다. 어떤 뉴스를 먼저 클릭해서 볼까. 어떤 메일을 먼저 열어볼까. 이렇게 미디어가 강요하는 선택지에 둘러싸여 아침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수많은 ‘선택을 강요하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우리의 아침은 벌써 시끌벅적해진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10분 내로 이렇게 많은 선택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버린다. 아침부터 맑은 머리로 시작하기가 참 어려워진 것이다. 선택은 희열보다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어떤 게 더 현명한 선택인지, 어떤 선택이 더 밝은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 너무 많은 고민에 둘러싸여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 ‘어떤 선택에 따라 장밋빛으로도, 잿빛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환상에 중독되어 있다. 물론 어떤 선택은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이 과연 ‘우리 자신의 선택’일까? 예컨대 마트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선택할 때도 우리는 머리를 쥐어짜게 된다. 저마다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요구르트 하나를 고르는 데도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은 과연 ‘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일까.

마트에서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우리의 직업, 사랑, 출산, 양육의문제까지 모두 ‘개인의 선택’에서 좌우된다는 믿음.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이것을 ‘선택의 폭정(tyranny of choic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 단정하는 사람들, 거꾸로 ‘선택을 잘하면 어떤 위험이나 불안 요소도 줄일 수 있다’는 믿음들,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의 결과’로 몰아붙이는 사회 분위기. 이것이 모두 선택의 폭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리스크를 피하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 배운다.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 배운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보다는 안정된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내가 많이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조언도 받는다. 불확실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 학습 받는 것이다.

 

# ‘제한된 선택’의 함정에 빠진 현대인

 

레나타 살레츨은 자신의 책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에서 ‘선택의 폭정’에 길들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구나 현명한 선택을 하면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확신, 자기계발을 통해 자신의 성격까지 개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혹한 ‘선택의 전쟁터’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다. 예컨대 안나 쿠르니코바와 마리아 샤라포바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로 발돋움 한 후 러시아 전역의 시골 마을에는 우후죽순처럼 테니스 코트가 생겼다고 한다. 가난한 부모들은 ‘샤라포바처럼’, ‘쿠르니코바처럼’ 자신의 딸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엄청난 시간과 돈을 자식들의 훈련에 투자한다. 하지만 러시아보다 훨씬 체계적인 스포츠 시스템이 갖추어진 미국에서조차 아동 1만 명 당 한 명만이 대학에서 체육 특기자 장학금을 받고, 1만 명 중 6명만이 프로 선수가 될 기회를 얻는다. 누군가가 성공하면 그 길로 우르르 몰려가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력한 트레이닝과 투자를 일삼는 부모들의 ‘선택’은 과연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일까?

레나타 살레츨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한 아름다운 여성은 자신이 ‘선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드레스 한 벌을 고르는 데도 한 달이나 걸렸고, 하룻밤 머물고 싶은 호텔을 찾는 데도 몇 주가 걸렸다고. 그리고 지금은 정자 기증자를 고르는 중이라고 말이다. 살레츨은 깜짝 놀라 ‘무엇이 그리 급하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압권이다. “올해 말이면 마흔이 되는데, 지금까지 매번 남자 선택에 정말 재주가 없었다고요.” 그녀에게는 남자를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합리적 선택’의 문제였던문제였던 것이다. 매번 온갖 판단력을 동원해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던 그녀는 ‘왜 나는 그토록 열심히 선택을 해왔는데, 결과는 이토록 참담한가’라는 절망에 빠져버린 것. 그래서 남자를 고르는 ‘골치 아픈 선택’을 건너뛰고, 차라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정자를 ‘선택’하여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그다지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사주와 타로점에 귀를 기울일 때도 있고, ‘합리성’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주관적인 조언’에 따라 행동할 때도 많다. 또 ‘내가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느라 진짜로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합리성’만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나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는 쾌락이나 효율, 안정이나 행복을 위해서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선택이라는 차원으로 보면, 알프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또 자신을 괴롭히는 타입의 남자를 선택하는 여성의 미묘한 심리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음식점들 중에서 ‘왠지 마음에 끌려서’ 들어가는 순간의 알 수 없는 희열이나 기시감을 설명할 수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선택이 미래를 만든다’는 단순한 합리성이 아니라,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에만 매몰되어 ‘사회적인 선택’, ‘공동체의 선택’, ‘나만 생각하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할 시간과 여유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진실로 원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대세나 유행이 아닌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순간’의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공동체를 위한 선택을 해야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전문가의 손’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점점 무력화하는 시대이다. 내 삶을 내가 일구고, 가꾸고,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각종 전문가에 맡김으로써 사람들은 부를 과시하거나 혹은 자신의 처세술을 자랑하곤 한다. 하지만 언제든지 주치의를 부를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대신에 늘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삶이 나을까, 아니면 늘 부지런히 일상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며 좀처럼 병원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는 건강한 삶이 나을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든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대신 늘 골치 아픈 문제에 시달리는 삶이 나을까, 아니면 법 없이도 살 사람임을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나을까?

우리는 이제 개인의 선택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선택’이 있음을, ‘공동체의 선택’이 있음을 서로에게 일깨워줘야 한다. ‘진정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질문’을 더 많이 생각해내야 한다. ‘나’ 단위만이 아니라, ‘너와 나’의 단위, 가족단위만이 아니라 이웃의 단위, 마을의 단위, 공동체의 단위로 사유할 수 있는 용기와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

사뮤엘 존슨은 진정한 선택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보여준다. “자기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이 반드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라.”


글 정여울
정여울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해 ‘마음의 서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