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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뉴욕 갤러리 터줏대감, 프랭클린 파라슈(Franklin Parrasch), 딜러의 열정

by 하나은행 2015. 5. 6.
Hana 피플

뉴욕 갤러리 터줏대감, 프랭클린 파라슈(Franklin Parrasch), 딜러의 열정

by 하나은행 2015. 5. 6.

미술 시장은 작가, 컬렉터 그리고 그들을 잇는 딜러로 구성된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하는 이가 없다면 작업실 한쪽에서 영영 방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재능 있는 작가들을 만났을 때 늘 가슴이 뛴다는 딜러,프랭클린 파라슈.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30년간 묵묵히 갤러리를 일궈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프랭클린 파라슈(Franklin Parrasch)를 알게 된 건 1997년, 뉴욕대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다. 갤러리 운영과 업무에 늘 관심이 있던 데다, 프랭클린 또한 나와 같은 학부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다고 해 그의 갤러리에 인턴십을 지원했었다. 

 

프랭클린 파라슈 갤러리는 유니크한 작가들을 선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캘리포니아 스타일의 공예,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원로, 신생 작가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미술에 대한 그의 독특한 취향과 넘치는 유머 덕분에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처음 갤러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대학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졸업 전시회에서 가구 작품 전시를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작품들을 보면서 당시 관심 있던 설치 작업들이 떠올랐죠. 저는 그것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가구라기보다 독립된 설치 작품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작품을 만든 학생은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 장점을 살려 예술 작품을 만들었던 거죠. 저는 ‘가구와 예술’, 이 두 가지에 강하게 매료되었고, 갤러리를 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은 성공한 갤러리 대표이지만 시작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학교를 졸업한 뒤 워싱턴으로 거취를 옮겼어요. 대학 시절 룸메이트가 그곳 출신이라서 워싱턴에 대해 많이 듣게 되었는데, 꼭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느 날 우연히 <워싱턴포스트>에서 적절한 갤러리 공간이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고, 바로 아버지께 ,000달러를 빌려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죠. 가구, 전시 받침대 등을 만들며 공간을 꾸미는 것부터 갤러리 프로그램을 계획하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했어요.

 

1986년 당시, 갤러리를 오픈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1987년 증권 시장 폭락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이 오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처음 1~2년은 꾸준히 수입이 있었지만 갤러리를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밤에도 부업으로 일해야 했죠. 그럼에도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갤러리를 열고 2년이 될 때까지 공간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작품들을 구입해준 컬렉터가 있었거든요. 그 사실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럼 뉴욕에는 언제 오게 됐나요?

 

1989년, 뉴욕 소호에 있는 큰 보금자리로 갤러리를 이주하게 되었는데 갤러리의 비전과 프로그램을 모두 넓힐 수 있게 되어 매우 설레고 즐거웠죠. 소호에 꾸린 갤러리에서 가구 디자이너 개리 녹스 베넷(Garry Knox Benn ett)과 존 시더퀴스트(John Cederquist), ‘SITE’라는 설계 그룹 설립자인 제임스 와인즈(James Wines), 건축가 미셸 오카 도너(Michelle Oka Doner), 조각가 캐시 버터리(Kathy Butterly), 마이클 프림키스(Michael Frimkes s), 켄 프라이스(Ken Price) 등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소호가 예술 시장의 중심이었던 시절이군요.

 

네, 집값이 치솟기 전이죠. 1995년 말, 수많은 예술가와 갤러리가 소호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급부상하던 로어 이스트사이드로, 또 어떤 이들은 첼시로 이주했죠. 전 평소에 시드니 제니스(Sidney Janis), 자비에르 포사드(Xavier Fourcade), 베티 파슨스(Be tty Parsons) 갤러리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해온 57번가의 갤러리 거리와 역사를 동경해왔어요. 그곳에서 제 갤러리가 더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주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가 미술 시장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을 때에도 현재 갤러리가 있는 미드타운을 떠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2011년, 자크 포이어(ZachFeuer)가 첼시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공간에 들어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공간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알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전시를 소개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했기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지요.

 

그렇게 문을 연 두 번째 갤러리에서 마르시아 하피프(Ma rcia Hafif), 존 매클로플린(John McLaughlin), 마이클 윌리엄스(Michael Williams), 존 알툰(John Altoon), 대니얼 터너(Daniel Turner) 등 수많은 작가의 전시를 선보이며 1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 갤러리가 위치한 큰 타운하우스 공간을 찾기까지 3년 정도는 미드타운과 첼시 두 곳을 함께 운영했어요.

 

 

선반 위에 놓인 작품들. (왼쪽) ‘Dear Irene’, Joan Snyder, 1970. (가운데) ‘Untitled (geometric)’, Ken Price, 1982. (오른쪽) ‘Untitled’, Agnes Martin, 1975

 

 

뉴욕 맨해튼 64번가에 자리잡은 프랭클린 파라슈 갤러리의 사무실

 

 

물론 작가와 얽힌 일화가 많겠지만 특히 조각가, 켄 프라이스와의 인연이 남다르다고 들었어요.

 

처음 켄 프라이스의 작품을 보게 된 것은 제가 학생이던 1982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 제가 뉴욕으로 갤러리를 이전하던 때였을 거예요. 이미 프라이스는 꽤 유명한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화랑 관계자들을 통해 그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어요. 로스앤젤레스의 제임스 코코란(Jam es Corcoran) 갤러리와 뉴욕의 찰스 콜스(Charles Cowles)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거래했었죠. 이후 1993년, 작가에게 직접 팬레터를 썼고,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저를 작업실에 초대한 켄 프라이스가 “나의 딜러가 되어주기 바란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의 말이 아주 생생히 들리는 듯해요. 제 갤러리 역사의 획을 긋는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죠. 

 

이후 그의 전시를 통해 문화예술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고, 미술관과 협업하는 순회전 또한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주요 미술관이나 컬렉터들에게 제 갤러리를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죠. 프라이스는 제가 로스앤젤레스 작가들의 작품과 뉴욕의 미술 시장을 잘 융합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두 지역 간의 지역적 격차를 뛰어넘고자 하는 제 노력에 관심을 가져주었죠.

 

그는 저를 수많은 LA의 작가들, 예컨대 조 구드(Joe Goode), 래리 벨(Larry Bell), 에드 러샤(Ed Ruscha)와 같은 아티스트들에게 소개시켜주었고, 갤러리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갤러리에서는 총 11번 프라이스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전시는 열릴 때마다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갤러리에서는 설치 미술가, 론 쿠퍼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미니멀리즘한 조각 작품과 흰 벽면이 어우러져 묘한 오라를 뿜는다.

 

 

프라이스 같은 원로 작가 외에 어떤 신진 작가들을 발굴했는지도 궁금합니다.

 

30년 동안 딜러 생활을 하며 수많은 젊은 작가를 만났는데, 그들의 반짝이는 재능은 늘 저를 가슴 뛰게 합니다. 캐시 버터리, 커즈, 마이크 윌리엄스, 대니얼 터너 같은 작가들과는 갤러리 초창기 전시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작가들의 신념과 열정이 갤러리의 비전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그들은곧 미술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고요.

 

 

프랭클린 파라슈가 손님, 친구들을 맞는 응접실에는 작품이 다수 걸려있다.(왼쪽부터) ‘Untitled (Light Trap)’, Ron Cooper, 1970. ‘Fats’, Ken Price, 1999. ‘Untitled’, Agnes Martin, 1975. ‘Untitled (The White Painting)’, Michael Williams, 2011. ‘Dear Irene’, Joan Snyder, 1970. ‘Untitled (geometric)’, Ken Price, 1982.

 

 

갤러리 대표의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희 부부는 결혼 전부터 함께 작품을 컬렉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서도 예술이 늘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저는 아이들이 작가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미술이 삶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지금 제 딸은 대학에서 도자를 전공하고 있어요. 켄 프라이스나 피터 볼커스 작가와도 잘 알고 지내며, 미술 작업과 역사적인 배경에도 관심이 많죠. 

 

 

프랭클린 파라슈와 그의 갤러리가 지나온 발자취를 보면 아티스트와 미술 시장의 융합과 교류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작가들을 연결하고, 유명 아티스트와 신진 작가들을 한데 묶어 전시를 열었다. 프랭클린 파라슈는 단순히 작품을 거래하는 딜러를넘어 미술 시장의 다양성을 지지하고 선도하는 미술 애호가임에 틀림없다.

 

글·강희경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재석 | 사진·강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