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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정절과 기개를 품은 명장의 죽세(竹細)공예

by 하나은행 2015. 7. 16.
Hana 피플

정절과 기개를 품은 명장의 죽세(竹細)공예

by 하나은행 2015. 7. 16.

세계 유일의 오죽장으로 오십여 년을 대나무와 함께 한 윤병훈 명장(83)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 소리,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큰 키와 푸른 이파리들의 축제. 대나무 숲의 풍경이다.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간직하는 대나무는 우리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기도 했고 사군자와 십장생의 하나로도 귀하게 여겨왔다. 그래서인가. 대나무를 이용한 죽세공예는 한국의 얼이 담긴 전통공예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친다.

글 강명희 기자 | 사진 김동욱 기자

대나무 소쿠리, 대나무 목침, 대나무 붓, 대나무 보석함, 대나무 필통 등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나무하면 그저 단단하고 질긴 생명력 외엔 특별한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옛 선조들에게 요긴한 생활용품이던 죽제품이 플라스틱 제품으로 대체되면서 어느새 사양사업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재래시장이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 제품은 중국산이 대부분이다 보니 우리의 전통공예라고 하기에도 머쓱해진다. 하지만 죽세공예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손으로 후세까지 오래도록 지켜내야 하는 우리만의 전통 공예임을 간과한 것이 사뭇 부끄러워진다.

고려사 권 122 열전 35 백선연(고려 의종 때 관노) 조에 의하면 “서리 진득문이 두 사람 섬기기를 마치 노예같이 하여 보성판관에 제수되더니 죽제품인 책상과 상자를 만들어 바쳤다. 왕이 기뻐하며 그를 불러 내시를 삼았다.” 라고 하여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귀하게 여긴 작품으로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를 이용한 생활용품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경북 안동의 류성룡 종갓집엔 류성용이 사용했다는 서안(평좌식 책상)이 있는데, 오죽으로 만들어진 이 서안은 기교가 매우 정교하고 튼튼하여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푸른 잎과 곧은 줄기로 기품을 자랑하는 대나무는 옛 사대부 선조들이 사군자와 십장생을 통해 사랑을 듬뿍 주었던 식물이다. 우리의 전통 죽세공예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리고 계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담양의 ‘한국 대나무 박물관’이다. ‘한국 대나무 박물관’은 세계 유일의 대나무 박물관으로 대나무의 성장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과 옛 선조들이 만들고 썼던 다양한 죽제품을 관람할 수 있다. 대나무의 견고한 짜임과 문양, 쓸수록 빛이 나는 전통 죽세공예의 신비와 위대함을 만날 수 있다.

 


#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성질, 탄력이 특징

 

예로부터 담양은 죽향(竹鄕)으로 알려져 왔다. 대나무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호남과 영남, 충남과 동해안 등 주산지를 통털어서 담양이 전국 제일이다. 담양군의 죽물 역사기록이 담긴 ‘추성지(秋成誌)’에 의하면 본격적인 죽세공예는 우리 역사 중 문화유산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한 조선조 초기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대나무의 죽순은 임금님께 상차림에 올려졌고, 죽제품은 만주나 일본 등에 소개되었으며 대나무는 서민들의 생활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죽제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담양에 죽물시장이 형성되었고, 죽제품은 그 지역의 농가 수입을 올리는 부업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담양의 전통이 된 죽물시장은 지금도 5일마다(2, 7일) 열리고 있다.

대나무는 원래 중국 하남 지방이 원산지로 아열대성 식물이며 원나라 문헌에 의하면 20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왕죽, 분죽, 오죽, 신어리대, 산죽 등을 비롯하여 수십 종이 있다. 대나무는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물기에 강한 특징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와도 그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은 대나무 밖에 없다고 할 정도. 2차 대전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월남전 고엽제 살포에도 끄떡없이 버틴 것이 대나무라고 하니 그 생명력은 가히 위대할 정도.

대나무는 굵기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속이 빈 통대는 둥근 자연형태를 이용하여 필통과 화살통을, 얇고 가늘게 쪼갠 대쪽으로는 휘어지는 성질의 탄력을 이용하여 가로 세로로 엮어서 그릇, 목침, 고비(편지나 간단한 종이말이를 걸어두는 실내용 세간)를 만든다. 또 목재로 제작된 가구의 표면에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기하학적인 무늬로 엮거나 붙여 장식한 장이나 탁자 등은 죽세공예의 또 다른 백미다.

대나무의 곧은 속성은 학자의 숭고한 마음과도 같고, 반듯한 모습은 예의 바른 군자와도 같으며, 속이 빈 모습은 마음을 비운 도인과도 같다고 했다. 대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오죽이다. 오죽의 성장기간은 1년인데 녹색으로 자라다가 해를 더할수록 색의 진하기와 선명도가 더해지고 단단하고 윤기가 많아진다. 최소한 5년 이상된 대나무를 베어다 5년 이상 건조시켜 대나무장을 만들고, 통대로 쓸 수 있는 것은 10년 이상 건조한 것으로 사용해야 오랜 시간이 지나도 터지거나 틀어지지 않는다. 국내 유일의 오죽장인 윤병훈 명장에 의하면 “오죽은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속이 부드러워지며 겉은 내구성이 커진다”고 한다.

오죽을 만드는 일반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베기. 수분이 가장 적고 단단한 동지 이후부터 입춘 전까지가 적기인데, 이 때 5년생 이상의 것을 벤다. 두 번째는 건조. 햇빛에 뒤집어 가며 골고루 말린 뒤 통풍이 잘 되는 장소에서 습하지 않게 쌓아두었다가 입동 후에 다시 펼쳐서 다음 해 입하까지 말리는 등 건조 작업을 반복한다. 세 번째 대나무를 칼로 긁어내고 마디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 후 다시 건조시키기. 마지막으로는 용도, 색채, 굵기에 따라 대나무를 선별하는 죽장 작업을 한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100% 수공예로 만드는 것이 죽세공예품이다. 따라서 집중력과 끈기는 기본이고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작업하기 어렵다. 각고의 시간을 보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윤기를 더해간다는 죽세공예. 강한 생명력과 곧은 정신이 우리의 얼과 만나는 최고의 전통공예다.


# 휘어버린 손끝마디에서 살아나는 오죽의 신비로움을 만나다


세계 유일의 오죽장으로 오십여 년을 대나무와 함께 한 윤병훈 명장(83). 평생 오죽과 함께 했지만 지금도 대나무를 만지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언강 윤병훈 명장의 50년 세월을 거슬러 가본다

달콤한 봄비가 내리던 지난 4월 중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윤병훈 명장의 오죽 공예 전시관을 찾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단독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곳곳에 자리한 대쪽 박스가 객(客)을 반긴다. 전부 오죽이다. 거실 벽면에는 세계 출품전을 누비다 돌아온 명장의 대표적인 작품 고비가 걸려 있고, 다른 한켠 전시실엔 장롱과 좌탁, 서류함 등의 작품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윤병훈 명장은 1년 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며 작품을 만들고 있다.

윤병훈 명장은 우리나라에서 단 한 명뿐인 오죽장이다. 1995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윤병훈 명장은 세계에서도 유일한 오죽 공예인. 현재 그의 작품 두 점이 영국의 대영박물관 한국실에 입점되어 있고, 일본 메구로구 미술관, 태국 왕실 초청 아시아 죽제품 전시, 이탈리아 대사관 문화전시관, 독일 하노버 엑스포, 프랑스 마르세유 국제 박람회, 미국 6개 도시 순회 전시 등 10여 개 나라에 우리나라 오죽 공예의 독창성을 알렸다. 오죽의 매력에 빠져 오죽과 함께 한 세월이 50여 년.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에게 오죽은 평생을 바칠 만큼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왜 오죽일까. 오죽이란 무엇이고 그 유래가 궁금하다.

“오죽은 까마귀 오(烏)를 써서 까만색 대나무라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까마귀를 사람 다음으로 쳤어요. 부모 공양하는 건 금수 중에 까마귀가 유일하죠. 반포지효(反哺之孝)라고, 새끼가 자라서 제 밥벌이를 할 줄 알게 되면 부모 공양을 시작해요. 중국에서는 자죽(紫竹), 일본에서는 흑죽(黑竹)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선 오죽이라 하는데 반포지효의 고사성어처럼 효를 강조하는 전통에서 유래되었죠.”


그래선지 오죽은 예로부터 대쪽같은 절개를 지닌 사대부 문인들의 선비정신이 깃든 상징으로 표현된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이나 정몽주 선생이 순절한 개성 선죽교 등이 그렇다. 그가 오죽을 처음 만난 것은 20대 후반. 세계를 누비는 무역상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스위스 시계를 수입해 판매하다가 당시 금융 파동으로 일거리를 놓쳐 앞길이 막막했다. 이후 중고서적을 대량 구매하여 전국 학교 등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어느날 충남 부여에서 납품비를 받아 오는 길에 우연히 한 농부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며 무언가를 가득 캐내어 버리는 것을 보게 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바로 오죽이었다.

 

# 독학으로 옛 문헌을 찾아가며 일구어 낸 기하화법문양

 

한학자였던 선친께서는 평소 오죽에 얽힌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소상반죽’(요순시대 순 임금을 향한 두 왕비의 정절을 기린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죽을 빗댄 고사)이라 하여,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집안에 두고 즐기며 귀하게 여겨왔다는 것이었다.

“선친으로부터 들은 오죽의 의미가 새삼 큰 뉘우침을 주더군요. 한낱 대나무도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는데 나이 삼십이 다 되도록 뭐하고 살았나, 일희일비하며 오로지 돈만 좇고 산 세월이 부끄러웠어요. 그때부터 5년여 전국 방방곡곡으로 오죽을 찾아 다녔죠. 버려지는 오죽을 살리고 싶었어요. 오죽의 분포 현황을 파악하느라 전국을 다섯 바퀴쯤 돌다보니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도 듣고 가정에도 소홀한 아비가 되었어요. 그래도 오죽을 제품화할 수 있다는 확신은 버리지 못했죠.”


명장의 오죽공예 생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오죽은 특히 동해안 남쪽에서 자라는 오죽이 가장 좋고 기물을 만드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죽을 연구하다 보니 그 자연미와 신비로움에 반해 죽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죽장 공예는 사양길이라 대를 잇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 한 명 제대로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그때부터 혼자 옛 문헌을 보며 연구와 제작기법을 터득해가며 죽장 공예를 익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접착을 잘해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입문 15년 만인 1980년대 초, ‘제2회 아세아 평화통일 문화대전’ 공예부문에서 남북통일의 소망을 담은 현판 ‘염원’이라는 작품으로 비로소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숱한 실패 속에서도 독학으로 일구어낸 윤병훈 명장만의 기법 ‘편강에 의한 기하화법’이 빛을 본 것이다.

‘편강에 의한 기하화법’이란 오죽이 빛의 양에 따라 짙고 옅은 색을 발하거나 빛의 반사에 따라 여러 문양을 만들어내는기법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과 명암이 다르고 문양이 새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기하화법은 단순한 문양에서부터 작은 문양들이 모여서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이는 것까지 다양한데 죽공예품으로는 누구도 못해낸 것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후 한국민속촌 내에 있는 공방에서 작품을 만들었고 서울 북촌과 가평, 여주 작업장을 거쳐 지금의 파주로 거처를 옮겼다. 지난 2002년엔 북촌 한옥마을에 그의 호를 딴 ‘언강 죽장 전시관’이 세워지기도 했다. 명장이 40여 년 간 제작한 여러 작품들과 작은 오죽 조각을 5,555쪽 이어 붙여 10년 만에 완성하였다는 서안이 전시되었다.

“후계자가 없어요. 돈이 안되는 오죽공예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는 거죠. 대나무를 만지는 사람은 스스로 대나무가 되어야 해요. 제가 만든 작품은 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대물림되는, 한국의 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나의 바람을 나눌 제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결국은 못견디고 떠나요. 가장 큰 아쉬움이죠.”


명장은 ‘까마귀가 비둘기 속에 들어갈 순 없다’는 표현으로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100% 수작업인 죽장 공예. 아교가 붙지 않은 여름과 겨울은 그나마 작업을 할 수 없다. 제작 과정도 길어서 1년에서 5년, 10년도 더 걸릴 수도 있어 그야말로 돈이 안 되는 공예라는 것이다. 하지만 명장은 포기하지 않는다. 대나무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후계자는 반드시 있을 것이고, 우리의 전통공예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배려도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

대나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일까. 명장은 최근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노안이라 글을 읽기 힘들었는데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글이 보이고, 무성했던 백발 사이로 검은 머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오십여 년을 구부리고 앉아서 대나무를 만진 탓에 비록 등은 굽고 손끝마디는 전부 휘었지만 명장은 다시 태어나는 마음이란다. ‘건강하게 살아서 나를 더 오랫동안 지켜 달라’는 대나무가 주는 묵언처럼 들린다는 윤병훈 명장.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의 손을 잡고 당부한 말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마루 7길 77. 이곳 전시관 주소예요. 1년 동안 단 한 명도 구경 온 사람이 없어요. 이 근처 오시는 분들이 있으면 꼭 한번 들러서 오죽공예가 무엇인지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