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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옛 그림에서 우주를 만나다

by 하나은행 2015. 4. 2.
Hana 컬쳐

옛 그림에서 우주를 만나다

by 하나은행 2015. 4. 2.

“자네 딸의 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세대가 될 걸세. 가서 지구를 구하게. 하지만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는 7년임을 명심하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사(NASA)의 브랜든 박사가 조종사 쿠퍼에게 한 말이다. <인터스텔라>는 식량 부족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새 터전을 찾아 우주로 떠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쿠퍼를 비롯한 조종사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인류라는 더 큰 가족을 위해 우주로 향한다. 그들은 인류가 정착할 행성을 찾아서 우주의 새로운 시공간으로 침투하는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때 ‘웜홀(wormhole)’이라는 불가사의한 틈을 통과하게 된다.

‘웜홀’이란 직역하면 벌레 구멍이란 뜻으로, 우주 시공간의 벽에 생긴 구멍을 의미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토성 근처의 웜홀을 통해 새로운 우주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웜홀을 지나오니 제2의 지구가 될 후보들이 거대한 블랙홀 주변에 있다. 블랙홀은 중력이 엄청나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마저 천천히 흐른다. 행성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지구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고 마는 것이다. 브랜든 박사가 ‘행성에서의 1시 간이 지구에서는 7년’이라고 했던 것도 이 같은 중력에 따른 시간 지연 현상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관기망초(觀碁忘樵)’, 윤덕희(尹德熙), 모시에 수묵, 22×18.7cm, 18세기, 간송미술관

산속에서 한 나무꾼이 노인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허리춤에 찬 큼지막한 도끼가 나무꾼임을 말해준다. 그는 과연 이 도끼로 나무를 할 수 있었을까?

웜홀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공간 이동할 경우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설정의 미래 지향적 우주영화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옛 신선도 한 점이 떠올랐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윤덕희(尹德熙, 1685~1766)의 <관기망초(觀碁忘樵)>가 그것이다. 그림을 보면, 산속의 신비한 바위 옆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고,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무꾼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인 <관기망초>란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나무하는 것을 잊는다’라는 뜻이다. 이는 짐작하듯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의 근원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왜 이 그림이 생각났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설화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날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차츰 길이 넓어지고 훤해지면서 눈앞에 두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꾼은 무심코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세워둔 도끼를 집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끼자루가 바싹 썩어 집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보니 마을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한 노인을 만나 자기 이름을 말하자, 노인은 “그분은 저의 증조부 어른이십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신선들이 바둑 한 판 두는 동안, 인간 세상에서는 백 년도 넘는 긴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이는 <인터스텔라>에서 조종사 쿠퍼가 지구로 돌아와보니 사랑하는 딸이 임종을 앞둔 노인으로 변해버린 장면과 매우 비슷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낯선 세계를 여행하고 현세로 돌아온다는 설화의 중심 모티프가 이 영화의 포맷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신선이 사는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인 ‘동굴’은 영화 속의 ‘웜홀’을 연상하게 하고, 신선 세계에서의 몇 시간이 현실 세계의 수백 년에 해당한다는 설정은 우주에서의 시간과 지구에서의 시간 차이와 흡사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둑을 두고 있는 두 노인의 정체다. 이들은 다름 아닌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극성(南極星)이라는 별의 신선이다. 결국 나무꾼이 도착한 신선의 세계는 다름 아닌 별들의 공간인 우주였던 셈이다. ‘동굴’이라는 ‘웜홀’을 통과한 후, 별의 신선들을 만나고 그들과 보낸 몇 시간이 현실에서는 몇 백 년이라니! 어쩌면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 우주에 관한 첨단 이론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와 동양의 신선도가 이토록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옛 그림에 등장하는 ‘별에서 온 신선’을 만나보기로 하자. 

옛 사람들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별을 바라보면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며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가장 인기 있었던 별은 북두칠성과 남극성으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남극성은 스타 중의 스타였다. 장수를 상징하는 남극성은 수성(壽星)이라고도 하는데, 그림에서는 수노인(壽老人)이라는 신선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탄은 이정(李霆,1554~1626)이 그린 <수노인도(壽老人圖)>를 보면, 오래 살면서 자손만대까지 복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묘사되어 있어 그림을 보는 재미가 크다. 우선 남극성의 화신인 이 신선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작은 키에 이마는 유난히 높아 머리가 신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흡사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같다. 이 그림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수노인이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 들고 있는 복숭아다. 전통 신화에 따르면 이 복숭아는 3,000년에 한 번 꽃이 피고, 다시 3,000년 뒤에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복숭아는 대표적인 장수의 아이콘이자 수성의 상징이 되었다. 또 수노인의 허리춤에 찬 호리병박은 복숭아보다 더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어 유난히 눈길을 끈다. 

호리병박은 술이나 물을 담아 휴대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쓰였지만, 옛 그림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생태적으로 호리병박은 덩굴식물이어서 마디마다 많은 박이 조롱조롱 매달려 자란다. 덩굴을 한자로 하면 ‘만대(蔓帶)’인데 발음상 ‘만대(萬代)’와 같다. 따라서 많은 수의 박이 열리는 호리병박은 ‘자손만대(子孫萬代)’의 번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는 오래 살면서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함께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노인도(壽老人圖)’, 이정(李霆), 종이에 담채,95.4×46cm, 국립중앙박물관

작은 키에 머리가 유난히 큰 수노인(壽老人)은 남극성이라는 ‘별에서 온 신선’이다. 이 신선은 장수를 담당하는 별인 남극성을 의인화한 것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인기를 끈 스타 중의 스타였다.

그런데 <수노인도>를 보노라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신선인 수노인의 머리 주변에 박쥐가 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솝우화에서 박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체성을 달리하는 꺼림칙하고 얄미운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자 문화권에서 박쥐는 복을 상징하는 아주 귀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박쥐의 한자어는 ‘복(蝠)’인데 이는 복 ‘복(福)’자와 발음이 같다. 이 같은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박쥐는 복의 화신으로 이해되었다. <수노인도>에는 박쥐가 다섯 마리나 날고 있다.

다섯 마리의 박쥐는 바로 오복(五福)을 상징한다. 이는 오래 살고(壽), 풍족하고(富), 건강하며(康寧), 덕을 베풀고(攸好德), 편안하게 삶을 마치기를 바라는(考終命) 소망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덕을 베푸는 것’이 복을 짓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복된 삶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즘 말로 하면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데, 봉사하는 삶이 복 받은 인생이라는 대목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삼성도(三星圖)’, 김홍도(金弘道),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복(福), 록(祿), 수(壽)를 상징하는 별의 신선과 그들을 따르는 동자들을 그린 그림이다.
맨 위가 복성(福星)이고, 가운데가 녹성(祿星), 아래쪽에 복숭아를 들고 있는 노인이 수성(壽星)이다. 행복을 바라는 옛 사람의 소망이 한 폭의 그림에 오롯이 담겨 있다.

한편 장수의 상징으로 인기가 높았던 별인 수성은 복을 관장하는 복성(福星)과 출세를 맡고 있는 녹성(祿星)과 함께 <삼성도(三星圖)>로 제작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걸출한 화원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는 풍속화뿐 아니라 신선도를 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홍도는 <수노인도>를 확장해 당시 사람들이 인생에서 누리고 싶어 하는 소망들을 <삼성도>에 담았다. 그가 그린 <삼성도>에는 복(福), 록(祿), 수(壽)를 상징하는 세 신선과 그들을 따르는 동자들이 등장한다. 아래쪽에 복숭아를 들고 있는 노인이 수성이고 가운데가 녹성, 맨 위가 복성이다. 주목할 것은 모든 인물들의 시선이 수노인이 들고 있는 복숭아를 향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화면 맨 위쪽 복성이 안고 있는 동자는 복숭아를 잡으려는 듯 복숭아를 향해 팔을 뻗고 있다. 수성의 핵심 소재인 복숭아가 <삼성도>에서도 여전히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높은 관직(祿)에 올라 여러 가지 복(福)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 사는 것(壽)이 최상의 행운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옛사람들은 별을 향해 소원을 빌며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이러한 꿈과 희망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 신선도이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시대에 제작된 신선도가 미래 학자들의 우주에 대한 이론적 구상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또 별을 의인화한 신선도를 통해 옛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높은 상상의 경지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올 초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영화 <인터스텔라>가 크게 흥행하는 것도 선조로부터 이어지는 우주에 대한 동경이 작용한 때문인 듯하다. 때로 힘에 부쳐 넘어지더라도 옛 사람들처럼 우주를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는다면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발견한 우주의 신비이자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 김정숙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화 연구’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그림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감동을 학생들과 나누고 싶어 고려대학교에서 전통 미술 감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림을 통해 발견한 통찰을 모아 《옛 그림 속 여백을 걷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글·김정숙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