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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랩과 비트가 뒹구는 뉴욕, 그리고 두 청춘. 바스키아와 라멜지

by 하나은행 2014. 11. 12.
Hana 피플

랩과 비트가 뒹구는 뉴욕, 그리고 두 청춘. 바스키아와 라멜지

by 하나은행 2014. 11. 12.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알아도 그의 친구 라멜지(Rammellzee)를 아는 이는 드물 겁니다. 또 바스키아가 한때 꽤 진지하게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사실도 말입니다.

 

힙합 문화가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던 뉴욕에서 두 동갑내기 친구는 획기적인 앨범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1983년 발표된 싱글 앨범 <Beat Bop>입니다.

 

낙서 화가들의 힙합 앨범

 

라멜지와 케이-롭(K-rob)이 랩과 가사를, 바스키아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의 앨범 커버.

 

1970년대 뉴욕은 펑크, 록, 재즈, 힙합 문화가 뒤섞여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대던 곳이었습니다. 쇠퇴한 히피 문화와 벨벳언더그라운드가 남겨놓은 전위적인 사운드를 자양분 삼아 새로운 음악이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냈고, 흑인을 중심으로 한 힙합 문화가 태동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창작의 자유’에 있어서 제한선을 두지 않았던 이 뜨거운 도시에서 예술가들은 한껏 고무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다운타운, 할렘, 브롱크스에는 매일 밤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어울렸습니다. 바스키아와 라멜지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둘은 1978년 브래스 웨이트의 소개로 처음 만났습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집에서 탈출하다시피 거리로 나온 바스키아는 낙서 화가로 막 활동을 시작하던 참이었고, 라멜지는 스프레이 한 통으로 뉴욕 지하철을 장악하던 그라피티 아티스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랩을 ‘끝내주게’ 구사했으며 ‘고딕 퓨처리즘(Gothic Futurism)’이라는 자신만의 예술론을 주창하며 존재감을 빛내던 인물이었지요. 어쨌든 두 아티스트는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봤는지 이후 줄곧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Beat Bop>이 탄생하던 1983년은 바스키아가 미술계에서 ‘괴물 신인’으로 떠오르던 시기입니다. 애초에 라멜지는 바스키아와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는 ‘배틀 랩’으로 이 앨범을 구성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사와 랩은 라멜지와 케이-롭이, 앨범 커버는 바스키아가 맡게 됐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라멜지의 회고에 따르면 “바스키아가 랩을 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랩은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또 바스키아가 사랑이나 여자에 관한 가사를 써오면 라멜지는 “이건 라임을 맞출 수 없잖아” 하며 종이를 찢어버리거나 그의 얼굴에 던져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둘은 대립되던 성향 탓에 늘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정 전선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후 음악보다 그림에 더욱 치중했지만 <Beat Bop>의 뮤직비디오를 위해 기꺼이 그래픽 작업에 착수했지요. 랩, 그라피티, 브레이크 댄스가 중심이 되는 힙합문화에서 랩을 한다는 것은 유명해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바스키아는 가수 마돈나와 사귀던 사실을 일부러 공공연하게 드러낼 만큼 유명세에 애착을 보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랩에 욕심을 부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밴드 ‘그레이’의 전신인 ‘채널 9’에서 클라리넷과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던 경력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바스키아는 자의든 타이든 래퍼가 아닌 커버 아티스트로서 앨범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앨범은 혁신적이었습니다. ‘시험 삼아’ 만든 <Beat Bop>은 15만 장 이상 팔리며 라멜지가 뮤지션으로 활동하는데 탄탄한 기반이 되어줍니다. 그가 ‘힙합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것도 이 앨범 덕분입니다. 마약 중독자와 딜러가 도처에 깔린 뉴욕의 밤거리를 묘사한 이 노래는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는 탄력을 받아 이후 3개의 앨범을 더 냈지만 바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1989년 이후 2003년까지 공식적인 음반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사이 그는 ‘고딕 퓨처리즘’ 작업에 더욱 몰두한 것으로 보입니다. 뉴욕 거리에서 주워 모은 잡동사니들로 괴상하리만치 현란한 가면, 의상, 총 등을 만들어 좁은 아파트를 가득 채웠지요. 그의 가면과 의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하고 견고한 모양새를 갖추게 됐습니다. 아프리카와 인도풍인 것 같
지만 꼬집어 닮았다고 할 수 없는, 일본의 건담보다 화려하고 중국의 경극 무용수보다 견고해 보이는, 영락없는 뉴욕의 모습입니다. 그는 어쩌면 온갖 문화가 버무려져 굴러가는 도시의 찌꺼기들을 흡수해 ‘뉴욕의 화신’이 되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뉴욕 퀸스에 있는 파 로커웨이(Far Rockaway)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49세의 나이로 눈감았습니다. 평생을 뉴욕의 아티스트로 살다 간 셈입니다. 가만히 바스키아와 라멜지를 생각해보면 뉴욕의 지하실에서 청춘의 한 자락을 불태우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떠났지만 누군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예술의 모험을 하고 있을 테지요.

 

 

글·이소진 | 디자인·김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