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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아티스트x아티스트]플라토에서 만난 젊은 작가 경현수, 길종상가

by 하나은행 2014. 10. 15.
Hana 피플

[아티스트x아티스트]플라토에서 만난 젊은 작가 경현수, 길종상가

by 하나은행 2014. 10. 15.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보자마자 위대한 여류 화가의 등장을 알아챘고, 앤디 워홀은 거리에서 본 작은 엽서 조각에서 바스키아의 비범함을 눈여겨봤다. ‘해본 사람이 안다’고 했던가. 작가들은 때로 자신의 분야에서 반짝이며 빛을 내는 예술가들을 민감하게 포착하곤 한다. 플라토 미술관에서 열린 <스펙트럼-스펙트럼>展도 기획자가 아닌 작가가 추천한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다. 그곳에서 만난 아티스트 경현수, 길종상가를 소개한다.

 

 

해체하고 재조립한 생경한 공간
 

“길이나 공간이 작업 주제가 된 이유는 단순해요. 건축 모형용 라운드 스틱이 그 시작이었죠.”

 

1990년대 말, 경현수 작가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대형 공구상가에 들렀다가 우연히 얇은 라운드 스틱을 발견했다. 또렷하고 샤프한 그 모양새에 이끌려 작업실 한쪽에 두었는데 이후 설치 작업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도시를 거미줄처럼 엮고 있는 길의 갈래들, 얽히고설킨 대중교통 노선들. 철저히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길 한 가닥이 그에게는 미적인 운율로 다가왔다. 가느다란 존재들이 품은 공간의 심상을 본능처럼 얇은 스틱에서 발견한 것이리라.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작가는 지도의 길을 입체로 딴 뒤 재구성한 <경성시가도> <서울시 주요 도로>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보였다.

 

1. ‘Untitled’, mixed media, 33.5×36.7×59.7cm, 2012 2. ‘Geometry#1’, ‘Geometry#2’, acrylic on canvas, 각 60.9×73cm, 2012 3. ‘Debris 경부고속도로’, acrylic on canvas, 72.7×100cm, 2014

 

설치 작업에 매진하는 듯 보였지만 최근엔 회화 작업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전공이 회화라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선이 지닌 예리한 맛을 캔버스에 표현하기 위해 몇 년을 연구 시간으로 할애했죠.” ‘파괴된 후 남은 잔해’를 뜻하는 <Debris> 시리즈는 평면에서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연작이다. 그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 고속도로,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비행장 등 정해진 공간을 주제로 추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실제 공간의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데이터화한 뒤 비틀고, 변형하는 작업 과정을 거친다. 원래 공간의 형상은 지워졌지만 그 잔재들은 그대로 남아 화면을 구성한다. 곡선과 직선 그리고 면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실재가 사라진 빈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력에도 알 수 있듯이 경현수 작가는 엄밀히 ‘젊은 작가’는 아니다. 오히려 중견으로 접어드는 작가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미 2002년부터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리움 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전 작가 7명이 각자 주목할 만한 작가들을 추천했는데, 그를 추천했던 정수진 작가가 그와 동갑이다. “정수진 작가와는 처음 알게 된 사이예요. 어느 전시회에서 제 작품을 보고, 추천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이번 전시에 선보인 <4 colors>는 포스트 미니멀리즘 작가인 리처드 터틀이 갤러리스트에게 의뢰했던 초청장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최근작인 <Geometry> 시리즈처럼 강렬한 색감이 돋보이는데 가만히 살펴볼수록 두껍게 쌓인 물감의 무게가 진중하게 느껴진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지 물었다. “작업을 할수록 작품 언어를 견고하게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요. 또 내년 4월, ‘스페이스 윌링 앤드 딜리’에서 열릴 개인전을 틈틈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 방위 창작집단, 길종상가

 

1. 길종상가가 주최한 의류 판매 행사의 포스터 2. 문화역서울284 <인생 사용법> 전시 설치 전경 3. ‘노란잠수함 책장’, 혼합재료 4. 구슬모아당구장 <네(내) 편한세상> 전시 설치 전경

 

2010년 첫 활동을 시작한 길종상가는 한남동을 기반으로 가구를 제작하고, 생활 소품을 만들어 파는 공방이다. 그러다 멤버들 간 합이 맞으면 문화 공연을 진행하는 기획사가 되기도 하고, 소품이나 빈티지 원피스를 판매하는 상점이 되기도 하며,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예술가 그룹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의뢰인이 ‘네 명이 함께 작업할 수 있고, 각자의 메모 보드가 달려 있는 테이블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면 뚝딱 만들어주고, 전시가 잡히면 공간의 특성과 길종상가만의 개성을 반영한 오브제를 설치하는 식이다.

 

 

“저희는 늘 일을 하고 있어요. 디자인, 인테리어, 공연, 미술 등 장르구분 없이 각자 위치에서 따로 혹은 함께 움직이죠.”

길종상가를 처음 만든 박길종 작가는 주로 가구와 설치 작품을, 김윤하 작가는 조명과 식물에 관련된 오브제들을 만든다. 송대영 작가는 길종상가의 활동에 필요한 대부분의 이미지 작업과 음악을 맡고 있는데 ‘영이네’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다재다능한 데다 자유분방하기까지 한 이들의 활동은 입소문을 타면서 빠르게 회자됐고, 팬이 된 이들도 여럿이다. 설치 작가 김범 역시 이들을 눈여겨본 사람 중 하나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메일로 추천 의사를 전했고, 길종상가가 이에 화답하면서 전시에 합류하게 된 것. 그들에게는 대안공간 구슬모아당구장의 <네(내) 편한 세상>, 문화역서울 284의 <인생 사용법> 이후 세 번째 전시다. 길종상가의 작업 태도는 자유분방하지만 결과물은 성실하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아 귀에 걸면 다르고, 어 코에 걸면 다르다>는 로비에서 아트숍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설치된 작품이다. 현장 조사차 플라토미술관을 방문한 그들은 로댕의 브론즈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글래스 파빌리온’의 유리 벽과 대리석 기둥들을 눈여겨봤다가 이를 반영해 작품에 흰 기둥과 유리판을 짜 넣었다. 금속 오브제는 로댕의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작품을 참고해 설치한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에서 차용한 작품명처럼 작품은 전시가 끝난 뒤 필요에 따라 해체하고 재조립되어 상품으로 판매될 예정이다. ‘전시장에 있으면 작품, 매장에 있으면 상품’이라는 메시지를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길종상가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고루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상업 활동과 예술 활동을 병행하는 데서 오는 고민은 없는지 물었다. “글쎄요, 그런 고민이나 부담감은 없어요. 모두 저희가 하
는 일이고 일상적인 활동인 걸요. 굳이 경계를 짓고,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있는 세대가 아니니까요.”

 

 

글·이소진 | 디자인·김진영 | 사진·김동오 | 헤어&메이크업·이화, 김연진, 양지담(수빈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