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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3·1절 특별기획 1탄] 대한민국의 여성 독립운동가들

by 하나은행 2018. 2. 26.
Hana 컬쳐

[3·1절 특별기획 1탄] 대한민국의 여성 독립운동가들

by 하나은행 2018. 2. 26.

매년 3월 1일이면 거리를 수놓은 태극기만 바라봐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191년에 일어난 비폭력 만세운동인 3·1 운동을 기념하여 순국선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날인 3·1절이기 때문이죠.  

# 잊힌 그 이름, 여성 독립운동가

하지만 독립운동에는 잊힌 이름이 많습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요.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2,000여 명. 하지만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된 사례는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정도겠지요?

오늘은 하나은행 블로그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해보겠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까지 3남 1녀를 두었는데요. 4명의 자녀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녀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1907년 국채보상 운동 때에도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다고 합니다.

1909년 10월 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잡혀갑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마음이 무너진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한 장의 편지와 수의를 보냅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이 편지와 함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로 이주해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창립해 물적 심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끝까지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을 보면 전지현 씨가 주인공 '안옥윤'이라는 인물을 기억하실 겁니다. 독립군의 저격수 안옥윤의 모델이 된 인물은 '남자현' 열사인데요. 가정주부로 살던 그녀는 일본군에게 남편을 잃고, 3·1 운동 이후 아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합니다. 

그녀는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렸습니다. 독립군과 독립단체들의 단결을 위해 세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했고, 1933년에는 61세의 나이로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 온몸에 폭탄을 둘렀다가 잡혀가고 맙니다.

남자현 열사는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옥중생활 끝에 풀려났는데요. 스스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자녀를 불러 유언을 남깁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또한, 남자현 열사는 중국 화폐 248원을 주며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낼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은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에서 김구·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총칼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정정화' 여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은 더욱 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립운동을 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줄곧 도왔는데요. 3·1 운동 이후 상해에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상해와 국내를 오가면서 독립자금을 모았는데요. 치마폭에 독립자금을 숨긴 채, 압록강을 6번이나 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임시정부 내의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돌보며 역사와 국어, 춤과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녀가 해준 밥을 먹었고, 독립운동가들의 최후를 지켜준 사람도 장정화 여사였습니다. 무려 27년 동안이나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은 그녀에게 백범 김구 선생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고마움을 표했지만, 정정화 여사는 회고록에서 '그저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라며 아래와 같이 밝힙니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존몰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장정화 선생 회고록, 녹두꽃 중>

 


우리가 홀로 서 있을 수 있기까지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찾는 데는 남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의 흔적을 찾고 알리는 움직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는 3월 1일, 고마움을 담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쳤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