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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노충현 작가의 풍경탐독 :: 풍경의 민낯, 계절의 감정과 온도

by 하나은행 2015. 1. 7.
Hana 피플

노충현 작가의 풍경탐독 :: 풍경의 민낯, 계절의 감정과 온도

by 하나은행 2015. 1. 7.

노충현의 풍경은 우리의 일면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공간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과 회환을 밀어 올린다. 우리가 겪는 숱한 감정의 부유물들을 풍경 위에 계절의 정취와 작가 특유의 정서로 부려놓았다. 풍경에 고스란히 감응했던 깊은 사색의 붓질은 풍경의 질감을 더듬어보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풍경 속에 머물면 된다.

 

  지난해 여름 개인전 <살풍경 (Prosaic Landscape)>을 마치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올해 2월 누크갤러리에서 김윤수 작가와 2인전을 했어요. 전시가 끝난 이후에는 한강시민공원을 그렸던 <살풍경> 시리즈와 동물원을 그린 <자리>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외에는 몇 군데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요. 제 생활은 단조로운 편이에요. 특별히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드물고 주로 가던 곳이나 근거리를 다니는데, 특히 동네 산책을 좋아해요. 같은 장소를 돌아보면서 동네가 변하는 모습도 살피고, 장소들에 대해 이런저런 소소한 의문과 고민을 갖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 일상이에요.

 

  2005년 관훈갤러리 전시 기획 공모에 당선되면서 개최했던 첫 번째 개인전 <살풍경> 이후 여전히 ‘살풍경’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세요. 살풍경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보잘것없이 메마르고 스산한 풍경’이라고 설명되어 있더라고요.
살풍경 연작 중에서 초기의 그림들은 스산한 느낌이 있었어요. 한적하고 고립된 풍경이었죠. 가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사이의 풍경을 그리다 보니 쓸쓸한 계절 탓이기도 했고 당시 경제적인 여건이나 정신적 피로 등 제가 처했던 상황들이 그리 편치 못했던 때문이기도 해요. 최근의 겨울 그림은 이전 풍경과 차이가 있어요. 사람들이 계절에 대해 품
는 감정들이 비슷하지만, 겨울의 눈 내리는 풍경은 온기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을 그림들의 붓 움직임이 거칠었다면 겨울 그림에서는 붓의 강약을 줄이고 겨울 풍경 안에서 제가 느꼈던 조용하고 포근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제가 원하는 풍경 느낌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결’, oil on canvas, 112.5×194cm, 2011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보통 고층 빌딩 같은 랜드마크, 북적이는 번화가 등일 것 같은데요. 작가님이 선택하신 한강시민공원은 독특한 장소라고 느껴집니다. 이곳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00년대 초반 도시 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이 많았어요. 작가들 대부분이 고층 빌딩 같은 도시의 중심 모습에 주목했다면 저는 도시이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는 넓은 공간을 담고 싶었어요. 보통 가까운 곳에서 회화의 소재를 찾게 되는데 당시 제가 살던 곳이 한강시민공원 근처였고, 한강시민공원과 그 주변의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그리게 됐어요.

 

  다른 공간에 눈을 돌리실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한강은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는 공간인 것 같아요. 한강이라는 공간이 그림을 계속 그리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나요?
한강 풍경을 지속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다 멈추기도 해요. 작업을 하다 보면 다루는 대상이 지루하게 다가오거나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해당 작업을 멈추고 다른 장소를 그리면서 호흡을 조절하곤 해요. 그리고 다시 한강 풍경으로 돌아오게 될 때는 이전과는 달라지는 점이 생겨요. 같은 장소라도 그 풍경에 대한 제 감정이 변하기도 하고, 개발 등으로 그 공간이 없어지기도 해요. 때론 제가 그리고 싶은 계절이 바뀌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표현할 것이 늘게 되면서 그림을 완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요. 한강 풍경 중에서 대상에 대한 표현이 충분히 무르익은 그림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그림도 있어요. 아직 제대로 그리지 못한 봄과 다시 작업해보고 싶은 여름 풍경이에요. 한강이라는 장소에서 그림이 시작됐지만 한강에서 체감한 사계절 풍경을 모두 모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당장은 어렵지만 염두에 두고 작업하고 있어요.

 

  <살풍경> 연작을 보면 그 공간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이 엿보이는데, 작품 안에서 대상(공간)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살풍경>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사진을 처음 사용했어요. 걸으면서 촬영하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제가 대상과 머문 순간의 거리만큼 보는 이에게도 그 거리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리는 풍경은 평범한 풍경이기도 하지만 풍경 안에 극적인 요소도 없어요. 풍경 자체에 주목해서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햇빛이 쨍한 날보다 일부러 흐릿한 날씨, 스모그가 있어 그림자가 잘 보이지 않는 날 등을 택해 촬영하고 그림을 그렸어요. 자극적이지 않은 만큼 대상과의 거리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산책’, oil on canvas, 41×32cm, 2014

  직접 촬영한 사진을 참조해 풍경을 재현하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포착한 순간 같지 않아요. 익숙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전시 소개에서 작가님 고유의 회화적인 변주를 거친다고 표현돼 있는데, 회화적인 변주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그림을 그만두고 5년 정도 사회생활을 했어요. 그 기간에 했던 일들이 웹디자인, 스토리보드 작가, 무대 기획과 제작이었어요. 이후 2004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그림을 시작하게 됐는데, 그렇게 5년이 지나 돌아오면서 예전과 다른 사고와 방식으로 회화를 출발하게 됐어요. 풍경을 촬영한 후 회사 다니면서 배운 포토샵을 활용해 프레이밍을 하고, 색채나 명암을 조절해요. 그리고 프린터로 출력한 후 그것을 회화로 옮기는 것이죠. 촬영한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는데 그러면 그 안에서 어떤 풍경을 포착하게 돼요. 그리고 그릴 수 있는 것만 그린다는 원칙 아래 풍경 속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제가 그릴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그리곤 합니다. 제가 촬영한 사진은 사실 평범해요. 근사한 풍경들은 아니죠. 그러나 그림으로 옮겨왔을 때 종종 ‘왜 유독 이런 장면을 포착했어?’라는 질문을 받아요. 하지만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제게는 제 작품 속 장면들이 익숙하고 별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작가님 작품에서 풍경의 질감이 느껴진다는 표현이 있어요. 풍경에 질감이 있다는 표현이 생경하지만, 작품을 보면 어떤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돼요. 순간의 풍경에 대한 인상을 담는 과정은 어떤가요?
처음 한강시민공원을 그리려고 했을 때 ‘한강시민공원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풍경 그 자체뿐 아니라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색이나 뿌연 것, 먼지, 시멘트, 습기, 눈 등 공간을 덮거나 채우고 있는 요소들, 즉 풍경의 질감에 주목하면서 회화적 상상력이 발현됐어요. 그런 질감들을 관찰하고 그림에 들여오니까 전반적으로 색채들도 찾아지더라고요. 제가 주목하는 풍경이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애매모호한 풍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에도 계절이나 기후에 따라 제가 주의 깊게 살피던 지점이 두드러지게 되었어요. 제 정서와 감성이 그림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좌, ‘여름의 파라솔’, oil on canvas, 53×53cm, 2013. 우, '지하’, oil on canvas, 193×180cm, 2012

 

  한강시민공원 풍경 속에는 소복이 눈이 쌓이거나 물을 뺀 수영장 등 계절의 흐름,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그림이 그려지기 전 계절, 전 시간에는 왠지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 같은 장소들이에요. 또 살짝 바랜 듯한 색감도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한 것인가요?
한강시민공원은 유원지 성격을 띠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곳에서 실컷 놀고 떠나는 곳이잖아요. 그런 한철이 지나면, 이를테면 개장하기 전 공간에 꽃단장을 하는데 막이 내리고 꽃단장이 지워진 상태의 풍경은 아주 처연한 느낌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장소라고 하는 것, 머물고 난 공간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장소가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중요하게 여겼는데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동네가하루가 다르게 변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공간에 머무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신이 나오고 난 후의 공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기억이나, 그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무조건 새로워지면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사람이 없는 장소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요. 사람들을 빼고 장소를 보게 하는 거죠. 그러면서 사람들이 떠나간 이후에 남은 상태나 감정들을 나타내기 위해 색채에도 자연스럽게 바랜 느낌을 넣었어요. 최근에 와서 색채에 대한 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색채는 판타지를 주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어서, 예를 들어 눈을 그릴 때도 좀 더 주관적으로 색을 사용하고 있어요. <유수지의 밤> 같은 경우에는 노란색을 주로 사용했어요. 실제 풍경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그 순간 내리는 눈 속에서 제가 느꼈던 감정들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죠. 실제와 다른 색상 레이어를 화면에 입혀서 그림의 정취를 고조시키는
방식이에요.
 

  <자리> 시리즈는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동물원 그림이에요. 이 역시 시간의 흐름, 그곳에 머물렀던 존재들의 흔적이 두드러진 것이 그들이 현재 이곳에 없음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무대를 기획하고 제작하던 시절, 연극이나 뮤지컬, 오페라 무대 등을 많이 접했어요. 그러다 보니 동물원 우리가 현대극의 무대처럼 느껴졌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화면에서 동물들을 없애야 하거든요. 공간의 정체성은 그 안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는데 공간의 주체가 사라졌을 경우 그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져요. 그렇게 공간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생각했어요. 동물원이 주는 정취, 냄새 등을 체감하기 위해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참 많이 갔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곳 직원 외에는 서울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많이 갔을 거예요.

 

  <실밀실>에서는 현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키는 형무소나 교도소, 옛 안기부 건물 내부가 소재로 등장해요.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장소인데요, 이 공간을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실밀실> 연작은 2009년 정치 사회적인 이유로 우리네 삶이 척박해지고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무엇을 그려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의 작품이에요. 늘 매스컴을 통해서만 보고 들었던 장소에 직접 찾아가서 촬영하고 자료를 수집했어요. 일상적인 영역에 있으면서도 가려져 있는 공간에 대해,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
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게 되었어요.

 

'유수지의 밤’, oil on canvas, 182×259cm, 2013

 

  작가님 작품 중에서 제일 애정이 가는 그림이나 유독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요?
<유수지의 밤>을 좋아해요.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제가 보고 싶었던 풍경의 느낌을 구체화한 작품이에요. 서울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드는데, 이 풍경은 ‘아! 여기도 살 만하구나’라고 느끼게 해준 순간이 담긴 작품이죠. 퍽퍽하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때때로 그 현실을 견딜 만한 순간순간이 있잖아요. <유수지의 밤>은 일종의 그런 순간이에요.

 

‘얼음들’, oil on canvas, 162×227cm, 2013-2014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스텝에 맞추어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한 작업을 계속하다 감정의 변화를 겪으면 다른 것을 생각하는 편이에요.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지지부진한 부분이 있어요. 일단 내년 초에는 대구 분도 갤러리에서 단체전을 하고요.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갤러리 소소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여전히 한강과 동물원은 자주 드나들고 있고, 풍경을 담는 일상은 변함없어요.

 

 

글·윤연숙 | 디자인·류미라 | 인물 사진·한상무 | 도움·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