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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화가와 화가의 특별한 우정,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

by 하나은행 2014. 10. 22.
Hana 컬쳐

화가와 화가의 특별한 우정,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

by 하나은행 2014. 10. 22.

화가의 삶은 고독하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에서 이상을 찾고 그것을 실현하기까지의 외로운 싸움은 고루하고 고단하다. 그러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창작의 고통은 마땅히 이겨낼 수 있는 즐거움이 된다.

여기, 강렬하고도 순수한 우정을 나눈 세 쌍의 화가가 있다.
이들에게 친구란 또 다른 나의 영혼이며 세상이다.

 

 

# 고흐와 고갱, 아를에서의 한철

19세기를 대표하는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평생을 고독과 싸웠던 그에게도 잠깐이지만, 우정을 나눴던 친구가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살던 아를에 폴 고갱이 방문한 것은 고흐의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 반 고흐의 주선 덕분이었다. 당시 고흐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는데, 조용한 마을에서 고독하게 그림을 그리기보다 다른 화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고흐는 아를의 여러 화가들에게 이를 제안했지만 그의 부름에 화답하는 이는 없었다. 마침 고갱이 아를을 방문하게 되자 고흐는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새 식구를 맞이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갱의 생각은 그와 같지 않았다. 경제난을 겪고 있던 차에 테오 반 고흐의 부탁이 있어 아를에 잠시 머물기로 한 것일 뿐, 야심을 품은 고갱에게 아를에서의 생활은 절실하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던 어느 겨울날 고갱은 작업실에서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던 고흐를 화폭에 담는다.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는 고흐가 애착을 보였던 노란 빛깔을 띠진 않지만 캔버스에서 튀어나올 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작가의 상상을 더한 완전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고갱의 예술 세계를 그대로 담은 것이다. 그러나 반 고흐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격분한다. 고갱이 자신을 미치광이로 묘사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밤이었다. 고흐는 칼을 들고 고갱을 찾아가 위협하고, 결국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화가 난 고갱은 아를을 떠나고 다시는 고흐를 만나지 않았다. 무엇이 고흐를 화나게 한 것일까? 추측하건데 예술 세계를 공유하고자 했던 그를 무심히 대했던 고갱에 대한 미움이었을 것이다. 혹은 일방적인 우정에 대한 복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아를에서의 한철, 그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미술사에 새로운 역사가 쓰이지 않았을까? 그림 안에 들끓고 있는 고흐와 고갱의 영혼은 똑같이 뜨겁다.

 


#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마네와 모네. 두 사람이 여전히 함께 회자되는 것은 ‘아’와 ‘오’를 헛갈려서가 아니라 이들이 서양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그 이면에 ‘예술가들의 뜨거운 우정’이라는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가 자유로운 양식으로 화단에서 주목받던 시절, 클로드 모네는 이제 막 등단한 애송이 작가에 불과했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모네는 줄곧 마네와 비교되곤 했는데, 그것이 마네에게 반가울 리 없었다. 다만 모네에게는 마네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했다. 그래서일까. 모네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표현한다. 당시 마네의 것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지탄받고 있었다.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던 마네의 표현 방식이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네는 새로움을 갈망했던 마네에게 영향을 받고, 자연의 빛을 담은 정숙하고 섬세한 ‘점심 식사’를 완성한다.

1869년 바티뇰의 한 카페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이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된 두 사람. 마네는 젊은 모네의 재능과 실험정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모네는 마네를 정신적 지주로 의지한다. 모네가 아르장퇴유에 머물던 시절, 그는 배 위에서 강가의 풍경을 화폭에 담곤 했다. 마네는 작업하는 모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데, 이것이 마네가 야외에서 그린 첫 작품이 된다. 일렁이는 물결을 묘사한 기법에서 마네는 주저 없이 모네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훗날 모네가 말하길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마네가 죽고 모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구입해 루브르에 기증하는 운동을 벌인다. 그가 팔리에르에게 보낸 마네의 위대함을 적은 편지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모네의 노력은 새로운 도전에 길을 터준 선배를 향한 존경이자 영원히 한 쌍으로 기억될 친구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 지극히 순수한 예술과 우정, 칸딘스키와 클레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젊은 작가들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특정한 사건이나 이야기 대신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상적 생각이나 감정을 그리고자 했는데, 이에 의견을 같이한 이들이 ‘청기사파’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그 중심에 칸딘스키가 있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처음 만난 것도 청기사파 전시에서였다. 하지만 첫 만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공동체가 해체됐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독일의 조형학교 바우하우스에서였다. 이미 칸딘스키는 추상화의 대가로, 클레는 서정적 회화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던 때였다.

칸딘스키와 클레에게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교집합이 있었다. 음악이었다. 그들은 듣는 것으로부터 보이는 아름다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음악과 닮았다고 여겼고 음악을 통해 추상회화를 완성하고자 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당시 파격적이었던 쇤베르크의 음악을 이해하기도 했다. 클레 역시 음악과 밀접한 삶을 살았는데, 음악가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음악가와 화가의 길에서 고민한 적도 있었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한 인상을 <인상3(콘서트)>으로 남겼다면, 클레는 고전음악에 심취해 <바흐의 스타일로>를 남겼다.

칸딘스키와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 기숙사에서 위아래 층으로 살면서 더욱 돈독한 시간을 보낸다. 칸딘스키가 회고하길 클레를 만나려면 두 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통하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절은 다시 한 번 역사의 소용돌이로 끝나고 만다. 바우하우스는 나치당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만다. 클레는 스위스로 돌아갔지만 희귀병을 얻어 세상을 등지고, 그의 순수함을 사랑했던 칸딘스키 역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 생을 마감한다.

순수한 색과 단순한 형태로 추상회화를 구축한 칸딘스키와 클레. 이들은 음악에서 영감을 얻었고 감정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비록 삶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예술을 향한 이들의 순수한 열정은 여전히 그림과 함께 남아 있다.


글·박혜림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 | 사진·김동오 | 참고도서·《화가 vs 화가》(은행나무)